(6) 제비꽃

나는 그가 철저한 계획으로 설치해 놓은 유혹의 덫에 걸려들었다

허름한 집과 남루한 복장으로 깨끗한 동네에서 두드러지게 보인 것을 시작으로

해바라기를 한답시고 등하교 길에 자리를 바꿔가며 내 눈에 자주 뜨이게 한

시각 잔영 효과를 노렸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사를 받지 않고 말을 섞지 않는 등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뇌리에 심는 고도의 술책으로 자신을 각인 시키고

기묘함의 고소한 느낌이 발려진 바둑판위에 몇 수룰 유혹의 미끼로 사용하며

궁금증을 유발시킨 그의 함정 앞으로 한발 두발 다가오게 만든 다음

그 의혹을 해소 하려는 호기심을 자극해 자청해 한판의 바둑을 두도록 유도 당한 것이다

그리고 무료하고 지루한 그의 일상으로 나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그는

박포장기에 빠져든 시장판에 얼뜨기를 놀리듯 내 눈빛에서 가늠해낸 기력을 흔들어

희생양으로 걸려든 호승심 가득한 젊은이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놓고는

힘주고 당기면 비명을 질러대며 몸부림치는 내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을 것 이다

치밀하게 군데군데 덫을 설치한 악랄한 사냥꾼의 현란한 속임수에 걸려

그의 무료한 일상을 탈피하는 도구로 전락한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그의 함정에 빠진

토끼처럼 순진무구한 억울한 피해자 일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한 번도 손짓해 부른 적도 없었고

일부러 내 눈을 끌기위한 어떤 의도를 담은 작은 흔적도 남긴바가 없다

다만 그는 그냥 일상의 해바라기를 즐겼고 자기가 궁금해 하는 하나의 수를 읽고 있었을 뿐

야바위꾼처럼 내게 아무런 내기도 걸지 않았고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

그저 세월 흐르는 강가에 앉아있다 여러 번 주위를 맴돌며 기웃거린 한 학생의

호기심을 충족 시켜주며 한판의 바둑을 두어준 것 외에는 아무런 일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무에게나 속아 넘어갈 정도로 어리석지도 토끼처럼 순진 하지도 않다

올가미도 없는 덫에 스스로 걸려 들어가 몸부림치게 만든 건 젊은 내 호승심 이였고
제 손으로 목에건 덫에 붙어있던 열병에 걸려 근 일주일을 끙끙 앓아가며 지내야 했던 건
내 끝없는 자만심이 만들어낸 자존의 허상이 무너진  때문이다

몇 번이고 부딪혀 승부를 가르고 기력이 부족해 마음으로 승복하고 말았다면

그렇게 지독한 승부의 연연함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심한 사이에 카운터펀치를 맞고 쓰러진 억울한 복서처럼

다 펼치지 못한 내 기량의 안타까움은 전의를 불태워 갔고

통쾌한 설욕전을 위해 아버지의 유품으로 정리해둔 바둑 책에 먼지를 털어내며

대학 진학을 위해 접어둔 바둑 속으로 나는 다시 걸어 들어갔다

“명섭아! 일요일 인데 어딜 그렇게 다녀오니 너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니?”

안절부절 몇 번을 골목 앞을 살피기 위해 들락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휴일을 즐기며 쉬고 있던 어머니의 표정이 걱정스럽지만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자세한 설명을 할 새도 없이 또다시 그의 집을 향해 나섰다

승부욕에 휩싸여 눈도 귀도 멀어버린 마음은 좌우지간에 어떤 형태로든
끝장을 내지 않고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는 형체도 모르는 무언가에 몰려
허둥대며 쫒기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고 어둠이 슬슬 깔려갈 때 한번만 더 가보자 하고 나갔던

골목 입구 그의 집 앞에 는 웬 낯선 여자가 늙은이 외에는 아무도 출입이 없던

나무대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발밑에 그녀가 내려놓은듯한 두 개의 가방과 보따리 하나가 바닥에 있는 것을 본 순간

여자 도둑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싹 스쳐 지나갔다

“이봐요!

당신 누군데 빈집에서 물건을 들고 나오는 겁니까?“

어쩌면 여자라고 얕잡아 보며 깔보던 목소리가 컸던 탓인지

가까이 다가가며 소리를 지르자 상대방이 움찔 하며 당황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당신은 누구죠?

당신이 이집 주인이라도 되나요?“

얼굴이 맞닿을 쯤에 상대방이 오히려 내게 앙칼진 목소리로 묻자

딱히 뭐라고 답해줄 말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우물거리며 멍청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저,,.동네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이 물건을 들고 나오 길래...”

“이집 주인 하고 아는 사이예요?

내가 누군지 아세요?“

야무진 목소리로 몰아치며 그녀가 연거푸 물어오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멍해지고 말았다

모르지!

모를 수밖에 집 주인도 잘 모르는데 당신이 누군지는 더욱 모르지

말문이 막히고 어벙해 상대방을 바라보는데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녀는

눈에 확 띨 만큼 미인은 아니었지만 제법 예쁜 내 또래의 아가씨였다

“잘 모르는 일에 함부로 나서지 말고 길이나 비키세요!”

타이르듯 빈정거리는 말투를 톡 쏘아내고 그녀가 가방과 보따리를 들고

한참을 걸어간 다음에도 머쓱했던 마음을 다 잡지 못하고 서 있다가

그의 행방을 알고 싶어 안달이 난 나는 결국은 그녀를 쫒아가며 늙은이를 원망하고 있었다

만나기만 해 봐라 바둑판에 머리가 파묻히게 박살을 내고 말테니...

복수심에 불타 쫒아는 가고 있지만 상대가 내 또래에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여자에게 쑥맥인 나는 말 붙이기가 난감해 늙은이를 만날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녀의 뒤만 쭐레쭐레 따라 가며 애를 태워야만 했다

“이봐요!

학생 같은데 저녁이면 집에 가 이 닦고 잠을 자던 가 책 이나 몇 줄 더 보지

왜 쓸데없이 여자 뒤를 졸졸 따라 다녀요!“

계속 뒤를 따라오는 내가 거슬렸는지 흘깃 거리고 몇 번 돌아보던 그녀가

어린애 야단치듯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훈계조로 야단을 쳐왔다

빌어먹을 늙은이!

졸지에 치한이 되고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를 만나고 이상하게 모든 것은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