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께 도움이 될것 같아 예전에 월간바둑에 연재되었던
아마고수들의 스토리 중에서 골라보았습니다.
[바둑의 힘은 수읽기에서 부터]
;수읽기건 뭐건 일단 살아놓고 봐야
처음 월간 바둑 으로부터 ‘1급이 되는 비결’에 대해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에는 솔직히 얼떨떨하기도 했고 ‘내가 과연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정중히 거절을 했다.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많고 또 프로 기사들도 있는데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청탁을 할까 하는 생각이 우선 앞섰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프로기사들이야말로 타고난 기재가 워낙 특출할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일반인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시간과 노력을 바둑에만 쏟아 부은 사람들이 아닌가? 바둑을 취미로 두면서 더도 덜도 말고 딱 한두 점 정도만 늘어 얄미 운 적수를 적당히 혼내줄 수만 있다면 그뿐인 일반 바둑팬들로서는 프로기사들의 수십년 공부를 흉내낸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분들을 위해서라면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수련을 거친 프로보다도 바둑이 늘었던 과정이 지극히 ‘아마추어적일 수밖에 없는’ 나같은 사람이 오히려 적절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독자들과 면을 통해 만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수많은 패착과 자충으로 얼룩진 나의 바둑 공부 노하우를 통해 독자 여러분의 기력이 일취월장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코페르니쿠스 여행
내가 처음으로 바둑을 접하게 된 것은 국민학교 6학년 때였으니 12살 정도였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 방학이 사작되자 마자 나는 김포에 계시던 삼촌댁으로 달려갔다. 나는 사촌 동생들과 함께 뒷산으로 산딸기를 따러 가거나 냇가에서 개구리도 잡고 멱도 감으며 신나게 놀았다. 땅거미가 서서히 지고 놀이에 지치면 우리들은 원두막에 올라가 수박이나 참외를 깎아 먹으며 삼촌이 들려주시는 으시시한 귀신 얘기를 오들오들 떨며 들었다. 시골에는 왜 그리 귀신 얘기가 많은지. 얘기를 들은 날 밤이면 어김없이 혼자서 뒷간가는 일이 걱정이었다. 애국가를 스무번 쯤은 부르고 나서야 겨우 방문을 나설 수가 있었다.
어느날 동생들과 놀러 원두막에 올라 가보니 이놈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동안 바둑은 어른들이나 두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나로선 동생들에게 한마디로 석 죽을’수밖에 없었다. 사실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동네 형들이나 어른들을 통해 바둑뿐 아니라 장기, 화투 등도 도회지 아이들에 비해 빨리 접하는 편이긴 했지만 남들에게 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로선 오기같은 것이 발동할 수밖에. 그해 여름 방학 내내 오후의 일과는 무조건 ‘땅따먹기 놀이’에 푹 빠져 보냈던 것으로 기억난다.
까만 교복에 빡빡머리 중학생 시절부터 나는 기원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또래의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던 장소는 탁구장이었다. 갈 데도 놀 데도 딱히 마땅찮던 우리들은 탁구장에 모여 탁구도 치고 잡담도 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나는 별로 탁구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만나기 위한 접선 장소(?)로만 사용했던 것 같다.
어느날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 나는 우연히 눈에 띈 기원의 간 판을 따라 허름한 층계를 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년 간 잊고 살았던 바둑이 갑자기 생각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쨌든 따분하고 틀에 박힌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나는 ‘바둑’이라는 별천지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내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호주머니를 뒤져봐야 버스표 몇 장과 우동 한 그릇 사먹을 정도의 푼돈이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기료를 낼 수 없었던 나는 기원에서도 바둑을 둘 수는 없었고 그저 어른들이 두는 바둑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과자 먹는 친구 옆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아이처럼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어린 학생이 기원에 와 구경하고 있는 것이 기특했던지 아저씨들이 너도 나도 귀여워해 주었고 이것 저것 바둑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며칠 후부턴 바둑도 둘 수 있었다. 원장 아저씨가 “아직 학생이니 장학금(?)을 주는 셈 치겠다”며 기료를 전액 면제해 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나는 당장 깨지기 시작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처음으로 세상 만난 격이었다. 사촌 동생들과 둘 때나 어깨너머로 구경할 때는 그렇게 잘 보이던 수가 상대가 떡허니 앉아 있고 보면 안개 속으로 꺼지듯 눈앞이 새까매져오는 것이었다.
9개나 깔린 나의 돌들은 순전히 주인 잘못만난 죄값으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판밖으로 무수히 쓸려져 나가버려야 했다. 이쯤되면 또다시 오기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 기원에는 아마 강자로 이름이 나 있었던 김영모 씨나 강남식 씨 같은 사람들이 최고수로 있었다. 나는 무엄하게도 (?) 이 지엄하신 분들을 마음 속 깊이 라이벌로 꾹꾹 다져 넣었다. ‘기필코 실력을 키워 저들을 이겨 보이리라.’ 결의에 찬 나는 본격적으로 바둑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공부를 하자니 우선 당장 필요한 것이 책이었다. 나는 참고서 산다고 부모님께 타낸 돈을 가슴에 품고 일단 동대문 헌책방 을 이잡듯 뒤졌다.
수읽기의 힘은 사활에서부터
지금은 어지간한 서점에 가도 바둑책 코너가 별도로 마련돼 있을 정도로 바둑책이 지천에 널려 있지만 당시엔 제대로 된 바둑책 한권 구하기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일본책을 번역해 놓은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문제는 바둑의 '바' 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작정 번역을 해놓아 내용이 졸렬한 것들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진흙 속에 묻혀있는 진주를 대하듯 꽤 쓸만한 책들도 더러는 만날 수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동대문 어느 헌책방에서 헐값을 주고 산 1000문제집이었다.
이 책은 우 칭위엔(吳淸源) 기성과 조훈현 九단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세고에 겐사쿠(賴越憲作) 九단이 지은 책으로 꽤 까다로운 사활 문제 1000개가 수록돼있었다. 애초에 살 때부터 워낙 헐어 있기도 했지만 나는 이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어디나 가지고 다니며 들여다보았다.
일본의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九단이 한창 바둑 공부를 할 적에는 온통 머리속이 바둑 생각 뿐이다보니 길을 가다 툭하면 가로수나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치곤 해 그 흉터가 지금까지 군데 군데 남아 있다는 일화가 생각날 정도로 나도 딴에는 꽤 열심이었던 것 같다. 일단 죽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갑자기 바둑에 자신이 붙었다. 상수와 만나도 전처럼 대마가 뻥뻥 죽어 나가는 일이 부쩍 줄게 되니 겁없이 나가 싸워볼 여유도 생겼다. 지금도 나는 주변에서 바둑이 좀 늘고 싶은데 어떤 책을 보아야 합니까?”하는 질문을 받으면 "두말 말고 사활집을 열심히 볼 것”을 강조한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일단은 바둑판 위에서도 살아 놓고 봐야 끊든 싸우든 할 일인 것이다. 보통 중상급자 정도가 되면 사활집은 하수들이나 보는 책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프로들의 신수나 신형같은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활에 대한 대처 능력이 부족해서는 1급이 되기란 영 글러먹은 일이라는 것이다.
수읽기 능력을 키우는 데도 사활 이상의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바둑은 수읽기의 게임이다. 바둑에서 말하는 ‘힘’이란 바로 이 ’수읽기의 힘’을 가리키는 것이다. 수읽기는 사실 실전을 통해 배양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실제로 몇 수 앞을 ‘읽어서’ 내다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한 인내를 요하는 일로 실전에서 어쩔 수없이 만나지 않고서는 여간해선 공부하기가 쉽지않다.
수읽기하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일본의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九단과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九단은 당대에 깊고 정확한 수읽기로 유명했는데 기타니 九단의 수읽기는 “아니 거기까지 보십니까?”하는 수읽기요, 사카다 九단의 경우는 “아니 그런 수까지 보십니까?”하는 수읽기였다고 한다. 이는 수읽기의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을 나타낸 말로 기타니 九단은 수십 수 앞을 내다보는 양적인 수읽기에 강했고 사카다 九단은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도 기묘한 수를 찾아내는데 뛰어나 질적인 수읽기에서 특출한 능력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한때 사카다 九단은 하도 타개를 잘해‘타개의 사카다’로 불리운 때도 있었다.
정독과 속독을 병행하다
이 당시 나는 모든 용돈을 바둑책을 사는데 투자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책이 전무하다시피했던 시절 조남철 九단이 지은 행마의 급소 , 바둑개론 , 정석정해 등은 바둑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독파해야 할 필독서였다. 특히 정석정해는 당시로선 유일한 정석책이기도 했다.
정석정해 를 4회독쯤 독파하고나니 어느 정도 정석 모양에 자신감이 붙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바둑책을 볼 때도 정독을 하느냐 속독을 하느냐의 문제가 남게되는데 내 경우에는 정독과 속독을 병행하는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새 책을 구입하게 되면 마치 새 애인을 만나듯 슬렁슬렁 넘겨보며 얼굴을 익히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2회독부터 본격적으로 집중 공략을 시작하는데 이때도 너무 어려운 부분은 책 윗 부분을 살짝 접어놓고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3회독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2회독때 표시해 놓은 부분만 집중적으로 읽는 것이다. 이때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꼭 풀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이 반드시 필요하다. 모르는 부분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대부분 10분 이상을 넘기진 않겠지만) 물고 늘어지는 끈기가 요구되는 때이기도 하다. 마지막 4회독은 당장 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화장실 가는 길에 슬쩍 들고가 한번 쭈욱 훑어 보는 것으로 대신하면 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즐거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프로 기사의 기보를 놓아 보는 일은 재미가 있는 만큼 대단히 유익한 공부 방법이다. ‘프로의 명국 10국을 달달 외어 복기할 수 있으면 당장에 1급’이라는 말이 상당한 신빙성을 얻고 있는 형편이고 실제로 이를 실천에 옮기는 추종자들도 적지않은 줄 안다. 물론 대부분 채 1국을 외우기도 전에 지루함을 못이겨 중도 하차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긴 하지만. 나 역시 어느 정도 기초가 다져진 후에는 기보를 놔 보는 일을 했다. 해도 꽤 많이 한 편으로 현현각에서 나온 우 칭위엔 九단의 전집을 빌려다 방 에 틀어 박혀 몽땅 복기했던 적도 있었다. 한수 한수 ‘왜 여기다 놓았을까?” 골똘히 생각하며 놓다 보면 보통 한판을 놔 보는데 두세 시간 정도가 걸렸다.
우 칭위엔의 붙임수 하나를 붙들고 밤새 씨름하다 문득 창밖을 보니 하얗게 날이 새어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밤 나를 잠못이루게 했던 우 칭위엔의 붙임수와 함께 내 방을 서서히 붉게 물들여 오던 여명의 실루엣을 잊을 수 없다.
바둑은 허공에 점 하나를 찍는 것
요즘 사람들은 옛날 기보들을 잘 놓아보지 않는 것 같다. 아무래도 소목을 놓고 또 지키고, 거기에 외목, 고목이 난무하는 기보가 화점과 스피드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텁텁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추억의 명국을 놓다 보면 현대 바둑과는 다른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마치 옛날에 수장된 해적선에서 보물을 캐는 듯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나는 우 칭위엔 기성의 기보 뿐 아니라 법문사에서 출간한 일본 위기 명인전 과 기성전 전집을 복기하며 난해하기 짝이 없는 귀의 변화를 저절로 익혔다. 다만 기보를 놓는 공부를 할 경우 이 사람 저 사람의 기보를 마구잡이로 놓아 볼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한 사람의 기보를 놓아 보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기풍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좋아하는 스타일의 기사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만약 자신이 발빠른 행마를 좋아한다면 조훈현 九단의 기보집을, 그리고 중앙 바둑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면 ‘우주류’ 다케 미야 九단의 기보집을 구해 하나씩 꾸준히 독파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랑비에 옷이 젖듯 자신의 바둑도 자연히 그런 방향으로 틀을 잡게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바둑 공부에 매달린 지 1년 반 정도가 지나니 나도 모르는 새 그럭 저럭 1급을 두고 있었다. 공부를 한창 할 때는 한달에 한점 정도씩 느는 것 같았고 책 한권 읽을 때마다 한급씩은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하루에 15판씩 두기도 했다. 차츰 대회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으로 전국대회에 나갔던 것은 78년도 제5회 학초배였던가? 용산역에서 완행 열차를 타고 고생 고생하며 마산까지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미진하나마 내가 바둑을 공부한 과정과 방법에 대해 적어 보았다. 이 외에도 여러 방법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역시 젊은 시절 한때 바둑에 완전히 ‘미쳐버리는’ 기간이 없으면 결코 1급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바둑에 미쳐 있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바둑을 두다 차비마저 떨어져 늦은 밤 정릉 ‘아리랑 고개’를 터덜터덜 걸어가면서도 바둑이 있었기에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둑은 '허공에 점 하나를 찍는 일’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역시 어렵고 끝이 없는 길이 바둑의 길인 것이다.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의 기 력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시길 빈다.
월간{바둑}1월호 <체험수기>
아마국수 박성균 7단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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