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적(敵)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敵)은 카크 다글라스나 라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惡漢)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善良)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民主主義者)를 가장(假將)하고

자기들이 양민(良民)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選良)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會社員)이라고도 하고

전차(電車)를 타고 자동차(自動車)를 타고

요리(料理)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雜談)하고

동정(同情)하고 진격(眞擊)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原稿)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海邊)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散步)도 하고

영화관(映畵館)에도 가고

애교(愛嬌)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연희고지(延禧高地)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지도책(地圖冊)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職場)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洞里)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焦土作戰)이나

『건 힐의 혈투(血鬪)』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歡談)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土木工事)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市場)에 가서 비린 생선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戀愛)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授業)을 할 때도 퇴근시(退勤時)에도

싸일렌소리에 시계(時計)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 있다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은 민주주의식(民主主義式)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 그림자가 없다

하…… 그렇다……

하…… 그렇지……

아암 그렇구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아 그래……그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