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간, 마음에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백돌 하나가 반상에 놓이자, 흑을 들었던 사내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호, 우승해라.”

2

운명은 가정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경제가 IMF로 혼란스럽던 무렵,
아홉 살,
동네 어린이 바둑대회 우승.
운명은 마치 한 개인의 의지쯤은 가볍게 밟고 지나가는
거인의 발자국처럼……

3

‘Monochrome’, 바둑을 두는 사람의 아이디로 딱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마치 흑백영화를 떠올리는 듯한 이 단어는 곧 나의 인터넷 바둑 사이트의 아이디가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T 사이트는 한중일 각국의 기사들이 포진한 세계적인 대국실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난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 놓고, 인터넷 바둑 세상에 접속하는 날들이었다. 그랬다. 내 또래 친구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고, 나는 진지했다. 초등 3학년 시절부터 나의 사고와 관심사는 오로지 바둑판의 사각형 안에 둥지를 틀었던 셈이었다. 바둑판은 내 작은 세상이었고, 세계였다.

“야! 그거 재미있냐?”
친구들의 물음에 나는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4

“난 부자가 될 거야. 돈을 많이 벌면 바둑 같은 거 안 둬도 되잖아.”
재모가 바둑판의 돌을 담으면서 소리쳤다. 그와 나는 바둑도장 친구였고, 학교를 다녔다면 우리는 고1이었다. 바둑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아이들.

“어린 나이에 바둑을 알게 된 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바둑이 재밌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바둑이 직업이 되냔 말이야.”
재모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생수를 병째로 들이켰다.

“재미가 있어서 뭐가 문젠데?”
내가 물어보았다.

“재밌으면서 그 일이 직업이 된다면 정말 좋겠지. 그런데 그런 일은 흔치 않아. 어떤 특기라도 그게 직업이 되는 순간 재미는 사라져 버리거든. 왜냐고? 싫증이 나잖아.”
재모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너무 너만의 생각이 아닐까?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말해봐.”
“이유라기보다는, 결론적으로 바둑으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너무 좁아. 이창호처럼 된다는 건 허황된 꿈이라고 봐.”
재모가 제법 심각하게 얘기를 늘어놓았다. 재모의 말하기는 평소 요점을 내세워 얘기하는 나와는 바둑 기풍만큼이나 달랐다.

“왜, 자신이 없니?”
“이 도장에서 너한테도 밀리잖아.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바둑에 싫증이 난다거나 질리면 곤란하지. 너니까 얘기하는 거지만, 난 프로가 되고 나서 다른 일을 할 거야.”
재모는 그렇게 말하고 매섭게 코를 풀었다. 재모의 말들은 좀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프로 운운하는 게 거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프로가 되지 못한다면, 넌 영영 바둑을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될 때까지 말이지. 그렇게 좋아하는 바둑을…”
나는 무심결에 빈정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여튼 너희들과는 생각이 다른 거야.”
재모가 생수 값을 치르고는 가게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에 사로잡혀 멈칫하였다. 그러나 습관처럼 상대 전적을 따져보고는 불쾌한 감정을 지울 수 있었다. 지금 도장에서 승률은 내가 훨씬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5

바둑의 세계는 배고픈 야수들이 기웃하는 사냥터와 같다. 한때는 사슴처럼 온순했던 소년들의 마음이 냉혹한 반상 위에서는 야수가 된다. 다 자란 표범의 눈매로 매섭게 바둑판 주변을 살핀다. 설령 나이가 적어도 어리다고는 할 수 없다. 바둑계에서 어리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인 것이고, 성숙해야 살아남는 전쟁터다. 때문에, 신동 소리를 듣는 것까지가 그들이 나이로 누릴 수 있는 이점일 뿐.

바둑도장은 바둑 신동들이 집결한 곳이다. 이곳에 오기까지 수많은 승부에서 상대를 압도했던 녀석들은 오직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잔인한 법칙을 체득해 나가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반상 위에 선명한 자국 하나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야, 내가 너보다 삼킨 밥알이 얼마나 더 많은 줄 알아?”
기철 형은 밥을 먹다 말고 그렇게 말했다. 난 그럴 때마다 정말 그가 먹은 밥알을 다 헤아려볼 수 없는 게 난처했다. 기철 형은 마른 몸에다가 키 또한 나와 비슷했다. 그는 애매하면서도 실체를 알 수 없는 말을 잘했다. 난 그의 언변에 당혹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 형을 만났을 때 나는 정말 좋은 인연이라도 된 듯이 기뻐했었다. 간과한 사실은 그와 나에겐 승부라는 위험한 다리가 놓여 있었다는 것.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누구라도 지난 과거를 회상하면서 되돌리고 싶은 일이 하나쯤 있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그날의 일이 괴롭게 떠오른다. 혹자는 그것이 상처라고 하고, 또는 사춘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동네 어르신은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누구나 타인에 관한 말은 쉽게 한다. 그러나 누가 알랴? 그 당시 나를 지탱하는 힘을, 이 세상을, 사람을, 그리고 믿음까지도 타격을 받은 일을. 그런 건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로하며 ‘시간이 약’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그 사실은 날카로운 기억의 파편으로 자꾸 내 삶의 중심을 찌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치 안 보려고 해도 보이는 흉터 자국처럼.

6

그날도 똑같은 일과였다. 기철 형은 늘 하듯 조간신문을 읽었고, 나는 연구실로 들어가 기보를 놓았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이상하리만치 우리 몸에 있던 기운이 억제되지 않았다. 형은 장난을 심하게 굴었고, 거기에 나는 슬쩍 피하며 적당히 응수했다. 그가 구석의 문짝으로 나를 몰았다. 그리고 아픈 것도, 안 아픈 것도 아닌 펀치를 마치 잽을 날리듯 구사해댔다. 바로 그 애매함이 또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뭐라 항의할 수 없는 울분과 애석함은 당시 나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표현에 서툴렀던 당시의 나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이윽고 사건은 일어났다.

정신을 차렸지만, 그는 펀치에 당하는 쪽은 생각지 않고 괴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 난 불쑥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의 아래쪽 부위를 발로 걷어차고 말았다.

“윽”
형은 쓰러졌다. 미묘한 부위를 걷어차인 그는 그 아픔의 호소를 극적으로 연출하였다. 괴성을 지르고는 웅크린 자세로 한없이 가만히…… 시간이 지날수록 나로선 일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그러나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 몸 어디선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어서, 칠흑 같은 침묵의 십오 초가 천천히 흘렀고, 나는 조금씩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가 매섭게 눈을 흘기며 뭐라 욕설을 하고 문을 부수듯 박차고 나갔던 것. 그리고, 나의 고통은 시작되었다.

그 후, 나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기억한다. 정성스럽게 포장을 하고 편지를 동봉한 선물을 형에게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형은 선물을 받아 둘 뿐, 사과의 마음까지는 받지 않았다. 기숙사 화장실에 놓여 있던 나의 선물 인형을 보고 그걸 알 수 있었다. 도장과 기숙사에서 그를 마주치는 게 편치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갔다. 아! 미안하지 않음에도 사과해야 하는 이 마음을 누가 알아줬으면.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장난치고 친했던 도장 녀석들은 다 형에게 붙어버린 것이다. 재모는 내가 말을 걸어도 피했다. 녀석들은 이유도 없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화가 났다. 나와는 속내를 터놓고 이야길 나누었던 재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배신감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딱 한 번의 발길질에 대하여 녀석들의 행동이 이리 노골적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도장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멍하니 창밖만 바라다보는 날이 있었다. 사범은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세상의 평판과 달리 허울뿐인 신사, 즉 무심한 신사였다.

7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고, 다만 사활(死活)문제 하나를 풀어야 했다. 그 사활의 답은 매우 어려웠다. 도장을 나가는 원생들에게 통과 의례로 출제되는 문제였다. 사범이 바둑판에 그것을 만들어 보였다. 나가는 일을 하루 더 미루고 사활을 연구했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도통 답이 없었다. 다만 바둑의 사활문제는 정직하다는 점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실력대로 돌의 생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나는 누구의 배웅도 없이 도장을 나왔다. 한순간의 기행으로 이렇게 된 것이 나에겐 크나큰 충격이자 서글픔이었다. 일단 짐을 꾸렸다. 대전역 앞의 간이의자에 앉아서 밤하늘을 바라봤다. 무수한 별들이 가득 눈에 찼고,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흐린 상념에 빠졌다. 저 별처럼 고귀한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처럼 투박한 운석으로 남을 것인가…

8

20xx년 8월, 서울 한국기원에서 지역 연구생 입단대회가 열렸다. 나는 내신 1위 시드를 받아 본선에 직행했고 나머지는 예선을 뚫고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재모와 기철 형도 있었다. 기철 형은 연구생으로서 마지막 입단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았지만 냉정한 시선이 얼음 조각처럼 차갑게 느껴질 뿐이었다. 함께 있을 땐 둘도 없는 우정이었으나, 그렇지 않을 땐 남보다도 못한 곳이 도장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최강자들이 단 1명의 프로를 가려내기 위해 리그를 벌인다. 대회장에 기철 형과 그의 일당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몹시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리그 첫날 2승을 했지만 내 마음은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았다.

리그 이튿날, 오전 제 3국이 시작되었다. 그 바둑을 그르친 것이 이후 대국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고 나는 필사적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오후 대국의 상대는, 바로 기철 형이었다. 한때는 둘도 없는 형과 동생에서, 피할 수 없는 적이 된 이 현실. 나는 그때, 내 마음을 비집고 헤엄쳐 가는 연어 한 마리를 보았다.

이미 나와 마주 앉은 그는 태연한 얼굴로 바둑알을 집고, 유유히 착수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불꽃으로 활활 타올랐다. 반상은 온통 헝클어진 무늬들뿐, 더 이상 바둑을 둘 수가 없었다. 착수를 미루다 흑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바둑판이 쪼개지도록 천원을 향해 바둑알을 내리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미안해요. 저의 바둑은 여기까진가요 – 한국기원 앞, 좁은 골목을 걸어 나갔다. 2승 2패 이후 기권 – 이것이 기록의 전부였다. 주위 사람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9

사람들은 그를 정 사범이라고 불렀다. 그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재야의 고수.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기원으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바둑은 너의 인생에서 결코 마이너스는 아니라고 봐. 푸른 하늘 싱그러운 나무를 보듯 삶의 여유를 가지면 돼.”

나는 집으로 돌아가며 사범의 말을 곱씹어 봤다. 가을 낙엽이 스산하게 휘날리며 내 가슴 한복판에서 저물었다. 삶의 여유라니, 과한 시적 허용이 아닐까…

10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시작(詩作)노트를 보았다. 그것은 마치 비밀문서처럼 서랍에 숨겨져 있었다. 그 노트 속에는 아직 시가 되지 못한 단문들이 가득 씌어져 있었다. 그중, 한 구절이 강한 울림으로 내 눈에 들어왔다.

(바둑 고수 「태양의 돌」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후회의 날들……)
‘시라는 건 자학적이며 예술을 지향하나 무척 힘든 것’이라고 고백하셨던 당신. 그 후회의 감정은 어쩐지 나에게로 밀려오고 있었다. 사랑하지만 후회한다, 사랑해도 후회할 수 있다… 사랑과 후회를 결부시켜 생각하는 건 나로선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메모를 바라보며 숱한 생각을 했다. 프로가 되어야만 했던 절박한 감정과, 기철 형 얼굴 또한 겹치고 있었다. 나를 잡아당기던 바둑의 힘은 어디로 간 걸까? 사람에 대한 회의감으로 몸은 점점 움츠러졌다. 빛을 잃어 가는 태양같이…

그럴 때면, 살기 위한 습관처럼 우칭위엔 9단의 저서를 찾았다. 바둑으로 최고수의 자리에 올랐으며 생활 모습도 흡사 도인 같았던 사람. 다만 나로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을 뿐… 책의 중반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승부라는 것에는 인력 이외의 힘이 작용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중략)… 물론 사람에게는 때에 따라서 심신 조건의 좋고 나쁨이 있겠으나 그렇다 해도 승부의 결과는 그 실력 이상의 차이가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뭔가 사람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생 그 자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순간, 나는 기철 형과 있었던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우리는 어쩌면 반외에서도 승부를 다투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누구든지 이겨야만 한다는 압박이 너무 컸다. 승부에만 치중한 나머지, 정작 나 자신과의 승부를 놓쳐 버린 것이다. 한 번의 실수는 실로 컸다는 깨달음은 시간이 지나가고 남긴, 그제야 알게 되는 반성이었을까……

11

나의 마지막 이십 대를 보내는 계절이 왔다. 전국 아마 바둑대회에 참가한 나는, 강당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첫판의 상대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적이 없는 앳된 청년이었다. 이 무명 기사에게 허름한 잠바를 입은 중년 사내가 열심히 훈계하고 있었다.

“수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상대가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그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바둑 세계의 실정을 모르는 아버지가 이제 막 빛을 받으려는 꽃에게 너무 많은 양의 물을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판을 나는 쉽게 이겼다. 대회장 외딴곳에서 어느 부자(父子)가 같이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감상은 승부의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기에 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얼른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둘째 판에서 지금의 아마강자 송호선과 붙게 되었다. 남색 양복 안으로 매끄럽게 넥타이를 감싸 맨 그는 패션 감각이 뛰어났다. 그는 어딜 가나 바둑 팬들의 관심을 받았고, 정중히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서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흑으로 빠르게 집을 벌어 나갔다. 송호선은 두터운 기풍으로, 아마 바둑계의 정상에 올랐다. 패션과 헤어스타일, 한층 수려해진 인상과는 달리, 기풍만큼은 여전히 한결같았다. 그러나 두터움이란 결국 실리를 담보하는 것이며, 공격 대상이 사라진 두터움은 그 효과가 빈약해진다. 백 세력을 삭감한 돌이 전부 수습되자 형세는 흑을 쥔 내 쪽으로 확연히 기울게 되었다.

167수만에 항서를 받은 나는 오히려 멋쩍었다. 바둑 팬(정확하게는 송호선의 팬)이 몰려와서 복기를 요청했던 것이다. 마치 화해처럼, 바둑에서 승과 패가 허물어지는 순간은 바로 복기의 장면일지도 모른다.
이후, 3승을 거둔 나는 일단 한숨을 돌렸다. 또 다른 3승자와 일전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저만치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기철 형이다……'
아, 그의 얼굴에는 과거 장난기 많던 소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다음 판 상대, 기철.

예전과 같은 분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돌을 가린 결과 내가 백을 잡았고, 바둑은 빠르게 몇 수가 진행되었다.

“정호, 우승해라.”
천천히 강당을 걸어 나가는 형의 뒷모습에서 서른 살 나이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형…’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어렴풋이 한 단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미처 파악이 어려운 찰나의 기분과도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만든 반상의 국면은 이미 해독이 불가한 그림처럼 보였다.

그와 나, 두 사람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어떠한 힘, 바둑판을 앞에 놓고 우리를 헤어지게, 또 만나게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기철, 흑과 백의 돌이 만나듯, 어느 날 우리는 다시 만날 거다. 그래, 바둑의 운명처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