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사이버오로 왕별 7단이자 야구 통계학 블로그 '오나스의 야구학(https://blog.naver.com/namu6705)'을 운영 중인 아마추어 칼럼니스트입니다. 바둑기사들의 정확한 실력 측정과 국가대표팀 훈련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가 있어 오로 게시판에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전설적인 바둑기사 이세돌을 4대1로 넉다운시키며 세계에 충격을 안긴 것이 정확히 4년 전이다. 인공지능이 바둑을 정복하면서 바둑연구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몇백 년 간 정수로 알려졌던 수가 악수로 판명 나는가 하면, 10년 전에 두었다면 바둑학원 사범님에게 손바닥을 맞았을 수법이 새로운 정석으로 유행을 타기도 했다. 또한 예전에는 형세판단을 할 때 확정가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백 기대승률 71.5%’ 하는 식으로 정확한 형세를 알려주게 되었다. 인공지능이 바둑의 형세를 판단하고 다음 수를 결정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관련 기사를 참고하라.


​알파고 이후에도 바둑기사라는 직업은 멸종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 바둑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goratings.org에서 제공하는 세계바둑랭킹에 따르면, 이창호 9단은 과거 15년 이상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으며 장기집권을 했다. 이후에는 이세돌 9단이 바통을 이어받아 5년 동안 1인자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최근 3년간은 박정환 9단, 신진서 9단, 커제 9단이 엎치락뒤치락하며 1등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다.

​현재의 세계바둑랭킹은 Whole History Ratings(WHR)라는 알고리즘을 사용하는데, 이 알고리즘은 기본적으로 ELO 레이팅의 변형이다. ELO 레이팅은 기준 점수를 임의로 정한 뒤, (기준 점수)×(1-점수 차이에 따른 예상 승률)로 매 게임마다 증감되는 점수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이기면 점수가 올라가고 지면 점수가 떨어지는시스템인데, 점수가 높은 상대와 붙을수록 이겼을 때의 증가분이 졌을 때의 감소분보다 더 크다. ELO 레이팅에서 200점 차이가 나면 점수가 높은 쪽의 기대승률이 76%이다. 그런데 현재 세계랭킹 1위와 15위의 격차가 200점이 채 되지 않으므로 바둑 최고수들의 실력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ELO 레이팅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게임의 승패만 따지고, 과정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두 승률 그래프를 보자.

<그래프 1>

<그래프 2>


<그래프 1>을 보면, 빨간색 플레이어가 별다른 위기 없이 완승을 거뒀음을 알 수 있다. 두 곡선의 굴곡이 심하지 않으며, 100수 이후의 수순은 사실상 승부와 무관했다. 반면 <그래프 2>는 한눈에 보기에도 그래프가 들쑥날쑥하다. 내용적으로 양측 모두 실수가 많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 두 대국의 승리를 동등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계산하는 기대승률(Win Expentancy)은 기본적으로 ‘앞으로 최선의 수순이 진행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한다. 따라서 신의 한수를 두지 않는 이상 기대승률은 매 착수마다 내려가는 경향이 있다(50수에서의 기대승률이 흑백 각각 50%였다면, 흑이 51수를 둔 뒤에는 백 승률이 55%로 올라가고 백이 52수를 둔 다음엔 다시 흑 승률이 60%로 올라가는 식이다). 그러므로 한 판의 총 ‘Win Expectancy Subtracted’를 구한 다음, 그것을 착수 횟수(전체 수순/2)로 나누면 어떤 플레이어가 한 수를 둘 때마다 기대승률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낮아졌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수치에 기반한 새로운 레이팅 시스템을 ‘평균 WES’라 부르기로 하자.

​평균 WES는 ELO 레이팅에 비해서 여러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는 앞서 설명했듯이 판의 결과뿐 아니라 내용을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국면을 주도했는지, 상대의 실수에 힘입어 운 좋게 승리를 거뒀는지에 따라 차등적으로 레이팅이 매겨진다. 둘째는 집계 대상이 되는 표본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이다. ELO 레이팅은 표본의 단위가 판이므로 Small Sample Size의 문제로 대국 수가 적은 기사들의 실력을 정확히 측정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바둑 한 판당 평균 100회 이상의 착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으므로 평균 WES에선 표본 수가 압도적으로 커진다. 이에 따라 레이팅의 신뢰도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다. 셋째는 기풍 분석과 훈련에 활용하기 용이하다는 점이다. ELO 레이팅이 알려주는 정보는 ‘A기사가 강하다’, ‘B기사가 약하다’ 따위가 전부이다. 그러나 평균 WES는 초반, 중반, 후반으로 나누어서 통계를 냈을 때 특정 기사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파악이 가능하고, 기대승률 그래프의 모양을 보면 기풍이 어떠한지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데이터는 대국 상대 분석이나 자신의 약점 보완을 위한 훈련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물론 평균 WES에도 몇 가지 한계가 있다. 먼저 속기대국과 장고대국은 평균적인 기보의 질에 차이가 난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다. 속기대국을 많이 둔 기사는 장고기전에 주로 참여한 기사에 비해 평균 WES가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몇몇 기사들은 본인의 실수도 잦지만 상대의 실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다시 말해 승부호흡이 좋은 유형인데, 평균 WES는 오직 본인이 실수하는 빈도만을 측정하므로 이러한 유형의 기사들을 저평가할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A라는 기사가 상대한 기사들의 평균 WES와 그 기사들이 A와 둔 판들에서의 평균 WES를 비교하여 '실수를 유도하는 능력'을 점수화하는 해결책이 있다)

​야구, 농구, 축구 등 다양한 스포츠에서 통계적 방법론을 활용한 분석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물리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체육활동에 비해 통계화가 훨씬 용이한 보드게임은 오히려 분석학이 상대적으로 미발달한 상태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제안한 ‘평균 WES’의 아이디어는 바둑뿐 아니라 체스, 오목, 리버시 등에도 적용 가능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트제로 진행되는 여러 스포츠(배구, 테니스, 탁구 등)와 League of Legends 등의 게임 분석에도 활용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레이팅 시스템에 대해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한 사람의 바둑 팬으로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