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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의 나현은 어느 겨를엔가 우리의 뇌리 한 켠에 자리잡은 기사다.

그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예리한 천재성이 감추어져, 한눈에 알아볼 비범함은 어쩌면 잘 느끼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한결 같이 말한다. 결코 평범한 청년이 아니라고.

나현은 소년시절에 이미 대한생명배에서 우승한 바 있지만 그런 이야길 하자는 건 아니다. 경력은 일종의 참고가 되겠지만 잠재성에 대한 확신을 던져주는 건 아니니까.

그가 프로기사로서, 바둑으로 승부하는 이로서 가장 빛을 발한 건 제16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전에서였다. 배태일 박사가 매겨본 세계랭킹에서 한때 1위를 차지했고, 2009년 말부터 2010년까지 각종 세계대회 정상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한국엔 근심거리가 됐던 콩지에라는 난적을 맞아 나현은 담담히 승리를 거뒀다. 풋풋한 새내기 초단 나현이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됐다.

대국 내용을 보면 화려함은 없었지만, 섬뜩할 정도의 침착함이 배어났다. 여러 번 살펴봐도 눈에 드러나는 비범함은 없는데 속으로 숨어든 천재성이 터져나올 곳을 찾는 듯한 형상이었다. 마치 감춰진 천재성을 가진 이창호처럼, 나현도 그랬다.

나현에게 몰린 관심은 컸다. 3번기로 열리는 4강전에서 나현이 구리마저 이겨주길 바랐다. 너무 급하게 바랐을까. 아니, 솔직히 과도하게 바란 바둑팬은 거의 없었다. 상대는 세계대회 7차례 우승의 구리 9단이었고, 이창호ㆍ이세돌이 조기 탈락한 상황에서 콩지에를 꺾고 4강에 진출했으니‘그 정도면 잘했다. 내친김에 더 잘해봐라’라는 격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4강전은 2판 모두 나현의 참패였다.

구리 9단은 2-0 스코어로 승리한 후 인터뷰에서 과감한 이야기를 한다. “…나현 초단은, 힘은 더 키워야 한다…” 물론 이 앞에는 이창호 9단 같은 침착성이 있으며… 등의 이야기를 했긴하지만 아무래도 방점은 뒤쪽에 찍힐 것이다.

‘수읽기나 전투력을 더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는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같은 프로로서 자존심에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걸 감수하고 했다. 담박한 성격의 구리 9단은 적어도 그 이야기만큼은 국적을 떠나 후배를 아끼는 마음으로, 기회가 생기면 꼭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구리 9단의 전투력은 전 세계가 알아주므로, 나현 초단에게 언급한 힘의 범위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작전의 차질을 주지 않고 국면 운영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의미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나현은 명백히‘전투형 기사’는 아니다. 본인도 그렇게 밝힌다. 나현이 관심을 보이는 분야는‘끝내기’다.

나현이 프로 수업을 받던 시절, 나현은 다른 도장생들과 달리 빡빡하게 짜인 훈련을 강요받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묘수풀이를 하고, 기보를 놓아볼 때 나현은 혼자 바둑잡지를 펼쳐 옛날 뉴스를 보곤 했다(관전기가 아니다). 그러나 사범이나 관리실장은 그를 꾸짖지 않았다.

그는 가둬놓고 묶어놓을수록 위축되고 재능이 죽는 스타일임을 스승들은 알고 있었다. 나현은 그냥 풀어두면 더 잘했다. 나현은 멍하니 있다가, 또 생뚱맞은 것을 하다가도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발견하면 무섭도록 집중했다. 그중 하나가 ‘끝내기’였다. 그에게 끝내기는 단지 이기기 위한 필수 과목이 아니라 아름답고 웅장한 세계였고 바둑이 가진 묘미의 극치였다.

정밀한 형세판단을 하고 후반 부분변화에서 이해득실을 살피고 조금씩 우세를 찾아가는 또는 열세를 뒤집는 과정 하나 하나가 나현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구리와의 대국은 나현의 색채가 드러날 여백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구리의 페이스에 말렸다. 작전의 실패인지 아니면 긴장이 지나쳤던 것인지 또 다른 것인지, 여러 가지 분석을 나현은 해보았을 것이다.

나현은 구리에게 당한 패배로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별 상관없는 쪽으로의 자괴로 이어졌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 나현은 어리다. 자신이 가진 모두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온다는 것이다.

'묶어두면' 더 못했던 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