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전부터 산엘 다니고 있다.

산을 좋아하는 친구들 몇이서 모임까지 만들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휴일이 되면 으레히 산엘 간다. 그렇다고 뭐 특별한 동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건강이 나쁘다거나 운동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저 산이 좋아 다니기로 한 것뿐이다. 왜 힘든 산을 오르느냐고 묻는 말에 그곳에 산이 있기에 오른다는 말처럼 그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젊은 날에는 친구들 때문에 어쩌다가 산행을 하게 되었고, 또 산에 오른 뒤에야 자연에 감동하여 자주 오지 못한 일상을 후회하고는 했는데, 이제 정년이 눈에 보이는 지금은 산에 올라서 느끼는 감동이 오르기 전에도 이미 절실하게 다가와, 이제는 내가 먼저 산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내게 온 것은 모든 생명체는 결국 자연으로 회귀하고 마는, 일종의 종말을 기다리는 것 같은 쓸쓸함 때문이기는 하나, 사실은 그런 것이 보이기 시작한 나이테가 더 안달을 부린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나이쯤에는 자연히 산이 좋아지고, 또 산에 올라서야 세상 보는 눈이 비로소  뜨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선지, 산에만 오르면 세속에 절어 있는 자신의 추한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막혀있는 답답한 마음이나, 쓰리거나 안타까운 마음도 더러는 읽어 낼 수가 있다. 이래서 산은 더욱 좋아지고, 좋아진 산은 계절을 바꾸면서 늘 새롭게 다가선다.

 이른 봄에 산에 오를 때에는 풍치는 별로지만, 잔설을 뚫고 돋아나는 새싹과 얼어붙은 폭포를 녹이는 춘정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무섭게 느끼기도 하고,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 산을 오르면 젖어있는 흙과 푸른 숲, 지저귀는 새, 기어 다니는 미물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생동과 그 어우러진 조화에서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또 다른 질서를 보게도 된다.

 파란 하늘과 황금물결이 춤을 추는 만산홍엽의 가을에는 누구나 가볍게 쏟아 놓을 수 있는 감탄사나 수사는 오간 데 없고, 그저 산정에 서는 그 순간부터 입은 말을 잃고 마음은 생각까지 잃어버리게 한다. 눈에 보이는 현란한 풍광의 극치에 놀라게 되고 이 풍광을 연출한 자연의 신비에 다시 한번 압도당한다.  도대체 입이 떨어질 생각도 할 수가 없고 마음을 움직일 엄두도 나질 않는다. 다만 인간이 이렇게 못나고 왜소해 보일 수가 없을 뿐이다.

 무엇이 이 자연을 주재하길래, 그리고 무엇 때문에 최고의 걸작이라는 인간을, 순식간에  이처럼 만화로 만드는 것일까? 만족하고 겸손할 줄 모르는 인간의 끝 간데없는 탐욕을 벌하려는 가르침인가? 아니면 계절 따라 소멸되고 생성되는 변화 속에서 죽음이 곧 생명이라는 유전의 지혜를 가르치려는 것인가? 말을 잃으니 호흡만 가빠진다. 그래서 누군가가 “되어 나오는 말은 이미 진실이 아니라”고 했던가?

 이 것뿐만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 잔치가 끝난 마당처럼 썰렁하고 적막한 겨울산에도  올라 보라. 아무도 밟지 않는 눈길을 밟노라면 생명의 추악한 잔해들을 덮고 있는 말없는 설원은 오히려 풍광의 극치라는 가을의 찬가를 무색하게 하고 말 것이다.

 진정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듯이 끝없이 뻗어나간 산정의 설경은 조악하게 때 묻은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보게도 하고, 그리고는 깨끗하고 지순한 마음의 눈을 틔어주기도 한다. 소복으로 단장한 만상은 결코 주검을 슬퍼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아름다운 과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보다는 다시 찾아올 봄맞이에 바쁜 겨울은, 끝내 정중동하며 생명의 신비를 새로이 연출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만 같다. 마치 내일 죽어야할 운명을 모른  채,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는 백치의 그것처럼….

 이래서 만물은 유전한다는 것일까? 이제 산은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안식을 구하기도 하고, 이곳이 또 나의 사유의 세계가 되어 주기도 한다. 잠시 쉴 때, 발밑에서 기어 나오는 미물을 보고 존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존재의 가치는 진정 어디에 있는지, 벌써 여기서부터 마음은 날개를 단다.

 말없이 뻗어있는 능선과 준봉을 대하고도 태산처럼 무겁게 살지도 못했고, 굽이치다가도 때로는 돌아서는 계곡을 보고서도 물길 따라 흐르는 순리마저 배우지 못했으며, 잘나고 못난 것, 크고 작은 것, 희고 검은 것, 그리고 산 것과 죽은 것들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 내는 조화를 보고서도 존재의 사명과 평화를 깨닫지도 못했다. 다툼이 부질없다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얼마나 추했던가? 이어지는 의문은 선각자의 시심까지 절로 토해 놓는다. 여기에도 해답이 있다는 뜻인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욕망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어느 듯 해는 서산에 기울어 몸은 세상으로 다시 내려오면서도 마음은 한 조각, 구름이 되어 이제부터는 다시는 그러하지 않으리라 맹세도, 다짐도 하나, 몸과 마음이 그리 쉽게 떨어질 수 없는 인생의 덫으로 또다시 오욕에 떨어져야 할 이 끈질긴 운명은 정말 무엇이더란 말인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오랜만에 한 오늘의 산행은 뜻밖에도 더 높이 날고, 더 넓은 자유를 보았으나, 정신없이 묶여있는 이 인연의 끈들은 과연 풀릴 수나 있는 것인지 진정 알 수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