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裸道)
2.상흔(傷痕)-<4>
젊은 시절의 한 때를 꽃처럼 장식하며 피어 오르는 연애담(戀愛談)에는 필수적 절대적 운명적으로 보통 얼마 쯤인가는 드라마틱성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한 발 다가서면 에효오~하고 요리 빼칠하며 한 발 물러서고,또 한 발 다가서면 아휴우~하고 조리 빼칠하며 또 한 발 물러섭니다.그러다가,나중에는 다가서는 만큼이 아니라 뒤로 홱 돌아서서 우와아~무섭다아~고 비명까지 내지르며 씩씩씩~뛰어 달아 났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나란히 나란히 걷기를 반복했다거나,또는 신나게 다툼을 하고,엄청나게 곯라서 영화속의 주인공들처럼 전차길을 사이에 두고,서로 반대편의 플랫폼에 서서 얼굴을 외면한 채로 반대 방향의 전차에 올라타며 속으로는 죽여~살려~하다가도 또 언제 어느 적부터인지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 있더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저와 요시꼬와의 사이에는 그러한 드라마가 없었습니다.
이건 순전히 저의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이 만만찮은 현실적인 장벽에 가로 놓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주로 경제적인 문제였지요.실제로 일본에 사비(私費)로 유학하는 경우,부모로부터 학비와 숙식비 등의 제반 일상적 비용을 송금 받아서 꿀꺼덕꿀꺼덕~하며 생활할 수 있다면 몰라도 현지에서 아르바이트을 해가며 모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며 공부한다는 것은 무척 지난(至難)한 일이지요.무엇보다 우선 방값이 무척 비쌉니다.
당시,저는 일본의 중부 일원에서는 굴지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쥬니치(中日)신문의 조간판을 2구역 돌리는 것이 주력의 아르바이트였습니다.이게 생각보다 굉장합니다.일본에서의 학비와 기본 생활자금은 일단 이것 만으로 충분히 해결이 되데요.물론 상당히 근검 절약해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하는 것이기는 합니다.하지만 기본적으로 부모나 친인척의 도움없이 일본 유학을 원하는 분들은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일본에의 유력한 유학 루트이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런 사전 기본 지식이 없이 무작정 도일(渡日)을 단행했던 관계로 처음에는 무척 어려웠습니다.신문 배달을 처음 권유한 것도 사실은 학교 당국이었습니다.그리고 다행히 신문배달은 저의 특기 분야이기도 했지요.중1부터 고2년까지 씽씽씽~새벽을 내치어 달리며 역시 2구역을 신나게 배달한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아무튼 그 이외에도 학교 출판국의 잡일을 도와주는데 주 18시간 정도,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기계청소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장학금과 관련해서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만만찮은 학과 공부가 필요하고 가끔은 또 술도 마셨으니,학부에 입학하기 이전인 별과생부터 그러하였지만 일주 단위 만으로도 이렇게 공부로 아르바이트로 술마심 등으로 매우 상당히 분주한 일상을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따라서 요시꼬와 학교내의 여러 장소에서 동선이 겹치면서 마음 속에 은근하고 기묘한 친밀감이 싹터오르기는 시작하였습니다만,실제로는 제가 처해 있던 이러한 상황 때문에라도 그저 다정한 눈빛을 교환하는 일상적 관계영역에서 벗어나기 힘든 현실에 직면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께서 무슨 영험한 조화를 부리셨던지 요시꼬와의 관계가 소위 말하는 둘 만의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는 개인적 연인적 아기자기적 알콩달콩적인 영역으로 급격히 발전되는 계기가 도래하게 됩니다.
그 중요한 변곡점의 매개체가 되어 주었던 것이 우연찮게도 바둑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빡빡한 일상에 쫒기면서도 목요일 오후의 시간만은 터엉~비워놓고 있었습니다.저에게 유일한 안식일이었던 셈이지요.이건 제가 입학한 I대학의 학과 일정상으로 목요일이 말하자면 동아리날(部活動日)이여서 전 학부,전 수업이 오전으로 끝나고 오후에는 강의가 거의 없었던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해,제가 학부에 입학하던 1993년입니다.초여름의 어느 목요일 오후였습니다.날씨가 좀 더웠습니다.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생회관에서 김밥(노리마키메시,라고 삼각형의 형태입니다.)과 차(茶) 페트병을 하나 사들고 유학생실(유학생들의 휴게실 역활을 합니다.)에 들렀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아무도 없는데 허공에다 대고 안냥허세유우~까꽁~!하고 인사하는 것도 싱겁고 해서,할 수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묵묵히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바둑판과 바둑알을 가져다가 펼쳐 놓았습니다.그리고는 김밥을 으적으적~씹다가 목이 막히면 차도 꼴깍꼴깍~마셔가며,1990년 2월 2일에 두어졌던 제 34기 최고위전 도전5국을 조심스럽게 놓아 보고 있었습니다.이 대국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다들 알고 계시죠? <사이버오로의 명국감상>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관전 포인트 : 이창호 4단이 스승 조훈현 9단을 넘어 본격적인 정상권 등정을 시작한 첫 행보의 의미가 있는 판이다. 이 판을 시작으로 이창호 4단은 스승의 모든 타이틀을 빼앗고 1인자의 자리를 확실히 했으며 몇년뒤 세계대회 우승도 이뤄내게 된다.
- 결과 : 262수 흑반집승
제가 예나 지금이나 머리가 나빠서인지 아니면 노력이 부족해서인지,물론 둘 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무튼지 하나의 기보(棋譜)을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놓아 볼 수 있는 것은 이 대국이 유일합니다.하도 많이 놓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놓아 보며 가끔은 으흐흠~과연,하고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감탄하거나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가짜입니다.사실은 아무리 놓아 보기를 해보아도 이해되는 영역적 범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옆에서 누군가가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각각의 돌들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함축적 전투적 파괴적 평화적 안정적 미래적 의미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위 대국은 참으로 수도 없이 많이 놓아 보았는데 그 날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시꼬가 유학생실 앞을 지나치다가 고개만 삐쭉 들이밀고는 평소처럼 안냥하세요 까꽁~!하는 대신에 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잉~? 일곱길상 바둑도 둘 줄 아나 보네용~? 아이고오~놀래라~!
이러더군요.그리고 안으로 불쑥 들어서서 바둑판을 물끄럼히 내려다 보더군요.
이 때 저는 속으로 조금 삐쳤습니다.왜냐하면 요시꼬의 놀라워하는 표정이 저의 신경을 자극하였기 때문입니다.
아~그럼 내가 바둑도 못두는 줄 아나배에~!
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항변하고푼 것을 이쁘고 귀여운 젊은 아가씨에게 그럴 수는 없고,그래서 요시꼬 쪽은 흘낏 한 번 바라보았을 뿐으로 느닷없이 얼굴 전면에 짙은 우수를 띄우고 화난 듯이 바둑돌만 또가닥~또가닥~놓아갔지요.저는 그렇데요.제가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것에 대해 상대방이 아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하는 식으로 물어오면 사람 무시하는 것도 같고 은근히 신경질이 나데요.인간이 좀 덜 여물면 감정의 파동도 때로는 가볍게 출렁이는 것이겠느니~.ㅋㅋㅋ~.
아무튼 돌을 계속 놓아가자 요시꼬의 안색이 점차로 바뀌어 가더군요.
요시꼬와 정상적으로 한 수담을 나눈 것은 그로부터 좀 시일이 지나서입니다.학교에서 점심 시간에 몇 번인가 두어 보려고 시도을 했지만 착점이 워낙에 느려서 몇 수 못두고 끝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나도작가님들의 팔공모임 때,오로 굴지의 사진작가 팔공선달님께서 쓰신 어느 어르신의 바둑 두시는 모습의 설명문에,
이 상태로 10분....
하는 게 있어서 정말 배꼽잡고 자지러지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요시꼬의 바둑이 진짜 그와 거의 흡사해서 포석 단계에서부터 시간을 엄청 사용하더군요.저는 워낙에 동네 바둑이라서 그런지 너무 오래 생각하면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여 엉키는 듯한 느낌이 들고,또 실제로도 시간을 쓸수록 떡수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서 초속기로 일관합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결국 어느 공휴일에 제가 아르바이트를 쉬고,요시꼬가 저의 아파트에 놀러와서 마침내 대국다운 대국을 해보았습니다.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시간을 많이 쓰는 것에 비해 기력이 그렇게 출중한 것은 아니데요.기본적인 포석이나 행마,수 읽기를 어느 정도는 숙지한 모양인데 너무 교과서적인 측면이 없지 않더군요.또한 바둑 전판을 조망하는 시야도 좀 좁은 편이어서 중반전으로 돌입하면 돌이 몰리는 경향이 많고,전투력이나 타개 능력,그리고 끝내기도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데요.사이버오로의 기력으로 치면 대체로 5급 정도 될 거 같데요.그렇다고 제가 그보다 월등한 기량을 지닌 것도 아니여서 두어보니 그런대로 재미 있었습니다.
이런 느낌은 요시꼬에게도 있었던지,아니면? 저에게서 그 어떤 폭팔적인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던지 이후로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좀 지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그리고~하는 과정을 거치며 저의 아파트에 방문하는 횟수를 은근슬쩍 늘려 가더군요.
<계속>
으아아~지치네요.그럼 다음에 꾸우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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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맹물국수
boxtops
U리창엔B
팔공선달
한솔몽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