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길은 서둘러 한용운을 찾았다.

“무슨 급박한 일이 있기에 이렇게 서둘러서 보자고 하십니까.”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한용운은 용건부터 물었다. 그만큼 이재길이 긴박한 마음으로 만나기를 요청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로 분주하신 분께 죄송합니다. 긴히 상의 드리고 조언을 얻고자 급하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재길에게 제3단장 설민국의 이야기를 듣고 난 한용운도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는군요. 그렇지만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모두가 난처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총사령관님을 뵙자고 했습니다. 제 책의 여파가 이렇게 나타나는군요.”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서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요즈음에 많이 활용되는 블로그나 SNS 등에서 활동하도록 유도를 해서 그들의 충동을 발산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준비가 부족하고 때가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동지들이 다치거나 동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언제나 올지. 안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조차 드는 제가 동지들을 설득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미국에게 필요한 날이 지속되는 한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국제정세가 바뀌는 날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기다려야 하는 거죠. 의장님이 심지를 굳게 가지셔야 합니다.”

“만약 3단장이 막무가내로 행동으로 나서겠다면 어떻게 합니까.”

침통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영운이 말했다.

“이미 의장님께 말을 꺼냈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때는 둘 중 하나를 우리가 택해야죠. 제거하거나 지원하거나···.”

최선애가 일본으로 떠났다. 딸 민희를 한국에 둔 채, 아들 대한이만을 데리고.

하시모토와 그녀에게 성대한 결혼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조용한 재혼을 하려는 서로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최고급 웨딩드레스를 선물했다. 그리고 네 명이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 하객들을 모시지 않은 동생 부부만 같이 한 결혼식이었지만, 제대로 면사포를 쓰고 결혼식을 하고 싶어 하던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주고자, 하시모토가 혼인신고만 하자는 그녀를 설득해서 마련한 예식이었다. 간략한 예식이었지만 진심 가득한 그의 마음에 최선애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런 언니를 최선미는 꼭 안았다. 멀리 떠나는 언니의 여정이 이번에는 행복한 삶을 맞기를 기원하면서!

한국인 아들과 함께 나타난 그녀를 하시모토의 가족들은 따뜻하게 반겼다. 그 자리에서 하시모토의 부모님이 깜짝 놀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강대한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일본 전통의 인사법으로 절을 하며 큰 소리의 일본말로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아들 강대한 덕에 훈훈한 분위기속에 가족들과 첫 대면을 마치고 이른 저녁까지 같이 한 뒤, 하시모토와 최선애는 구단키타에 마련한 집으로 왔다. 그들이 살 집은 하시모토의 부모님 집과 멀지 않은 곳으로, 아버지의 회사도 구단키타에 있었다. 그의 형제들과 친지들도 대부분 서로가 가까운 치요다구 관내에 살고 있었다.

16살이 된 강대한은 일본에서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것이 기뻤다. 그는 한국에서의 삶이 고통스러웠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집에서 생활하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자괴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집안의 부족한 한켠의 자리! 그것은 그가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어도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무리 유쾌하고 쾌활하게 웃고 떠들어도 공허하게 비어있는 그곳으로 시린 바람이 늘 휑하게 훑고 지나갔다. 친아버지는 늘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버티고 있어주는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아무리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도 그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의 빈 자리가 가져다주는 공허함으로 그는 늘 굶주렸다. 그렇지만 하시모토는 비록 친아버지는 아닐지라도 빈자리로 남겨 있지 않고 늘 채워져 있을 거라는 믿음과 기대를 갖도록 해주었다. 그에게는 그것 이상의 것은 바람의 대상도 아니었다. 더구나 거기에 경제적인 안정까지 보장되었다. 엄마가 늘 집에서 자신을 기다려준다. 학교에 다녀온 뒤 배고파 혼자서 주방을 기웃거리는 일이 없어도 된다는 사실은 행복감이 되었다. 그런 기대감들은 그를 일본에서 만나는 생소한 다른 가족들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는 본능을 자극했다.

‘나는 이제부터 일본인처럼 살 거야. 아니, 일본인이 될 테야.’

어른들, 특히 엄마의 눈에는 아들의 마음이 읽혀졌다.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

‘온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내게는 다른 길이 없었어.’

그녀가 아무리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도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어쩔 수는 없었다. 아들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숫기 좋게 저렇게 나서는 성격이 아님을 잘 아는 엄마는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렸다.

‘이제부터는 우리 마음 다치는 일 없이 잘 살아가자. 우리가 여기서 잘 사는 모습을 보이면 민희도 같이 살고 싶다고 마음을 바꿔줄지도 몰라.’

이것은 소망을 담은 그녀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아들의 그런 모습에 애잔스러워 하는 마음을 알아챈 듯이 하시모토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부터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잘 살아냅시다.’라고 말하는 듯.

하시모토는 아내가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쉽도록 아파트를 준비했다. 아버지는 일본 전통 집을 권했으나, 나중에 아내가 일본 생활에 적응이 된 뒤에 상의를 해서 이사를 가면 되는 일이었다. 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하시모토는 즉시 살림을 시작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모든 살림살이를 갖춰 놓았다. 최선애는 남편의 자상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져 한 번 더 행복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와서 여유가 생긴 세 사람은 집안 구경을 마치고 거실에 앉았다.

“대한아, 집이 마음에 들어?”

“예, 마치 여행 갔다가 집에 돌아온 것처럼 하나도 낯설지가 않아요. 고맙습니다.”

“맞아, 집을 아늑하게 꾸며줘서 외출했다 내 집에 들어온 느낌이야. 나도 고마워요.”

“그렇게 느꼈다니 정말 다행이네. 우선 지금 우리가 상의할 일이 있어.”

하시모토는 강대한이 자신을 부를 호칭에 대해 어색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대한아! 아직 부자연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는 나를 아빠라고 불러야해. 그리고 이제 곧 학교에 나가야 하고 여러 가지 서류를 만들어서 일본에서 생활할 준비를 해야 해. 네 일본 이름을 짓도록 하자.”

“맞아, 일본 이름이 필요해. 당신이 좋은 의미로 하나 추천해줘.”

“그래요! 아들 이름은 원래 아빠가 지어주잖아요.”

강대한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의 말에 하시모토는 반색을 했다.

“내가 생각해 둔 이름이 있기는 해. 타이키라는 이름이 요즘 유행이야. 대大휘輝라고 한자로는 쓸 수 있어.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크게 빛나다는 의미 정도야.”

“타이키! 맘에 들어요. 엄마는 어때?”

“내가 뭘 알아야지.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쉽네, 의미도 좋고. 언제 이런 거까지 생각해뒀어요. 당신 참 자상하기도 해.”

“나는 당신 칭찬을 듣고 싶어서 꿈에서도 고민한답니다.”

“어이구, 못 말려요. 두 분의 닭살을 앞으로도 오래오래 보고 싶네요.”

타이키의 넉살에 세 사람은 한참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한영운 총사령관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원하거나 제거하거나’

조직의 존망을 좌우할 수도 있는 대원들의 돌출 행동은 동지라 할지라도 읍참마속의 예를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극단의 선택을 하지 않으려면 대원을 설득하거나 대원의 의지가 합리적이고 시의 적절할 경우에는 지원을 하라는 것이다. 역시 수십 년 동안 조직을 이끌어온 지도자의 냉철한 판단이었다.

이재길 의장은 설민국 단장과 오랜 시간 대화를 가졌다. 그리고 두 가지를 합의했다.

첫째는 아내의 허락을 얻을 것.

둘째는 실행하기 전에 실행계획을 의장의 동의를 받을 것

“의장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의분만으로 일을 저지르고 뒤에 닥칠 후폭풍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죠. 현명하고 애정 있는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대원들과 함께 연구를 한 뒤에 거사의 방법과 시기와 예상되는 효과, 문제점까지를 망라한 실행 계획서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내 입장을 이해해줘서 고맙소. 야스쿠니 신사를 도모하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에 따라서 국제적인 질서에 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동안 일본의 행패에 분노하고 응징하려 생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분들이 용기나 혈기가 부족해서 실행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잘 생각해보세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예, 단장님. 깊이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