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리가 바둑에 앞서서, 맘대로 잘 안 된다

바둑 즐기시는지?

우문이다. 즐기지 않는다면 이 글 읽지도 않으시리. 그런데 바둑 둘 때 언제나 편안하신지? 아마와 달리 프로들은 어떨까? <1도>를 보자.

1도 (강박에서 벗어난 걸까)
1973년 제28기 본인방전 도전1국. 백 본인방 이시다(石田芳夫) : 흑 명인 린하이펑(林海峰)

흑1(실전 흑125)은 49분의 장고 뒤에 나온 수. 필승을 다짐한 수였는데 이를 보고 다카가와 9단이 감탄했다.

“기막힌 수인데....”

이 수는 흑A 이하 흑E를 노리면서 또 백의 노림, 즉 백a 이후 b와 c를 맞보는 수도 없앴다.

이 바둑은 기억에 남아있는데, 무엇보다 린하이펑이 이시다에게 7연패를 당한 대국 중의 하나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린하이펑은 이시다에게 한때 심리적인 강박을 갖고 있었던 것인데, 그런 적이 있다면 저런 흑1을 둘 때는 자신에게 다짐을 한 번 두 번 거듭하는 것이 보통으로, 흑1은 그런 다짐과 같은 인상을 주는 수였다. 빈삼각의 인내가 저런 수다. 다행히 린하이펑은 7연패 후 4연승하여 이시다에 대한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바둑은 심리의 게임이다.

자신 마음대로 잘 아니 되는 놀이다. 마음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과 같이 바둑 또한 그러하다. 마음에 콤플렉스가 있는 것과 같이, 바둑에서도 그런 콤플렉스 적지 않다. 프로들도 많이 경험한다. 아니 프로이기에 더욱 체험의 고통 클지 모르겠다.

1969년 일본과 프로기사 교류전을 처음 가졌으나 0-3으로 완봉패 당하며
실력의 차이를 확인해야 했다. (자료사진/한국기원)

2. 바둑에서 일본에 대한 강박은 깊었다

한때 한국바둑은 일본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졌었다.

중반이 지날 무렵, “반집 승부군.” 문득 던지는 일본 기사들의 수준에 감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들은 한국에 와서 바둑을 둘 때, 대국 전날 술을 마시고도 당일에는 자신만만하게 두었다. 그리고 이겨갔다.

실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못지않게 고통을 준 것은 심리적인 열등감이었다. 한국의 바둑은 그 점을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승부세계의 문제로서 20세기 초부터 중국이 가졌던 열등감도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1970년대 말에 절정에 달했다.

1976년 방중(訪中)한 일본 대표단에 대한 녜웨이핑의 회고를 그의 저서(「바둑은 나의 길」)를 통해 한 토막 들어보자

“사카다 9단이 슬리퍼를 신고 유유히 오락가락하며 둘러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바둑판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바로 돌을 하나 집어 착점하는 오연한 거동과, 이에 반해 그와 대국하는 중국기사들이 머리를 끌어안고 고심하는 정경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일종의 압박감을 느꼈었다. 경력과 성망과 실력에 비추어 사카다 9단의 이러한 태도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2도(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엿보이는 장면)
역전(力戰)형의 바둑이다. 녜웨이핑은 중국 1위로 1년 전에는 다카가와 9단을 이긴 바 있다. 수읽기가 정확하고 감각은 안정감이 있다. 그러나 아직은 뭔가 세련되지 못한 상태인데, 그것이 여기 흑2 이하의 수순에서 드러난다. 흑2는 a에 두는 것이 보통.

초점은 흑2와 흑4의 감각.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엿보인다”는 것이 일본의 평이었다. (1977년 중국선수권대회 결승국. 흑 攝衛平 : 백 程曉流)

2-1도(1977년 중국선수권대회 결승국)
위 흑4  이후의 수순이다. 

한국의 경우도 하나 보자.

1969년 11월 제1회 한일 전문기사 교류대국에서 정창현은 이시다에게 백으로 2집반을 이겼는데, <3도>와 <4도>에 나타난 정신적 강박에 대한 정창현의 술회가 흥미롭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사와 일본기사 간에 서너 차례의 대국이 있었으나 공식으로 시합을 갖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큰 승부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긴장감에 쌓였다.”

“그들이 세다고는 하지만 흑을 잡고는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백을 잡고 보니 솔직히 말해서 좀 ‘앗찔‘했다.” (「바둑」 1970.2)

3도(열기 넘친 격돌)
백12 이후 흑A, 백B, 흑C, 백D까지 잡혔다. 흑a는 백b로 잡힌다.
흑9가 실수로, 단순히 a에 두었어야 했다. 그러면 백9 흑c로 패가 된다. (1969년. 백 5단 정창현 : 흑 6단 石田芳夫)

4도(기타니를 의식하여 실수하다)
“백1과 a 중에서 상당한 시간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나는 기타니(木谷實) 9단이 바로 곁에서 관전하고 있는 것을 알았고 실리에 매서운 기타니 9단을 의식하자 덤벙 백1, 3을 두어버렸다. 그러나 이 수들은 실리엔 매우 큰 곳이었으나 대세상으로는 a가 훨씬 컸던 것은 다음 복기할 때 비로소 확연히 드러났다.”
 

이후 실전은, 흑4 이후 <4-1도>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패착은 흑12다. a에 두었으면 흑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2집반의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정창현이 말했다.

“나는 이 바둑을 통해서, 승부도 중요하지만 바둑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얼마나 더 중요한가를 배웠다.”

강박은 불안으로 연결된다. 강박은 의지에 반해서 일어나는, 통제할 수 없고 반복되는 생각이나 행동. 그것이 강해서야 바둑을 이길 수 없다. 두기도 전에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문제를 좁히면 이러하다.

90년대 초까지 한국바둑은 일본의 바둑을 모델로 삼아 발전해왔다.

전문기사제도, 신문기전의 확산, 바둑잡지 발간, 연구생제도 등, 한국바둑은 모두 일본의 그것을 닮았다. 일본은 따라야 할 모델이었다. 이는 한국에도 잘 들어맞았다. 문화적으로 비슷한 점도 적지 않고 경제구조는 일본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델을 갖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문화적인 열등감을 갖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바둑에서 일본에 대한 강박은 20세기 내내 지속된 것이었다.

70년대의 실력 차이는 컸다. 69년 제1회 한일 프로교류전에서 1:2로 지고 70년엔 0:3, 71년엔 0:3이었다. 이후 일본기원의 중단 통보가 있었다. 실제 비공식까지 합치면 훨씬 많이 졌고 또 거의 전패였다. 2점 정도의 실력 차이가 있었던가 싶다.

문제는 간단치 않다. 모델을 따른다는 것만으로는 이겨내지 못한다. 혁신이 필요하다. 한국바둑은 일본에 대해서 큰 강박감을 가졌던 것이 사실. 그렇지만 이 강박을 이겨냈는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본은 1969~1971년까지 세번에 걸친 프로기사교류전에서 번번이 완승을 거두자
일방적으로 교류전을 중단했다. 그러다 1984년 재개했는데, 이때 조훈현 9단이 린하이펑 9단을
꺾으며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자료사진/월간바둑)

3. 콤플렉스의 자각 - 강박 극복의 논리

강박은 대단히 견디기 힘든 심리적 고통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한국바둑의 성장을 이루어낸 주제로 첫 번째 꼽고 싶은 것은 강박이다.

우리에게는 일본에 대한 - 실력이나 문화적으로 - 콤플렉스가 있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을 돌아보지 않고서 한국바둑을 논하기는 어려우며, 또 강박이야말로 삶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기에 못 본 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과연 우리의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는 어느 정도였으며 어떻게 콤플렉스를 긍정적 에너지로 바꿀 수 있었던가.

조치훈의 회고를 보면, 야마베 9단과 처음 대국할 때, ‘변환(變幻) 야마베(山部)’ 라는 말을 익히 알기에, 이 양반이 그 언제 신기한 수를 둘까, 하고 두기 전부터 주눅이 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승부는 그런 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떻게 하여 바둑이 늡니까? 슈코 답하길,

“젊은 친구가 선배나 명인에게 이기게 되면, 아, 별거 아니구나. 나는 이미 이기지 않았나?” 하고는 자신감이 붙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감이나 개인의 사적인 경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승부와 강박의 핵심을 여실히 강조하는 말씀이다.

강박을 이겨내는 논리 하나는 다음과 같다.

“지자, 져.” 실력 차이 있으면 지는 거지 뭐.“ 하고 두어보는 것이 좋다. 너그럽게 자신을 응시하면서 실제로 부딪쳐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불안이 되기 때문이다. 강박을 이겨내기 위해 강박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더욱 더 강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불안을 이겨내는 아마도 유일한 힘은 불안을 응시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는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생각하지 말자”라는 의지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의지로는 패배감만 높여준다. 실력이 없을 때 패배는 당연한 것. 그 당연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면의 패배의식과 열등감은 더욱 강화된다. 열등감을 떠올리지 않으려는 노력은 더욱 더 힘들어지고 악순환이 등장한다. 그러나 인정하면 그런 불안은 사라진다.

70년대 중반, 냉정한 응시와 함께 실력도 기르고 있었던 기사가 하나 성장하고 있었다.

조훈현이 말했다.(「바둑」 1977.8)

“일본바둑은 확실히 강해요.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저들의 자세는 우리가 배워야지요. 공부해야 되요. 공부하지 않으면 뒤져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우리가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할 대상으로 일본을 꼽았는데 이젠 상황이 달라졌어요. 중공 말예요. 기보를 봤는데 완전히 일본 정상급의 수준이에요. 녜웨이핑 하고 한 번 겨뤄보고 싶습니다.”

과연 냉정하다. 그리고 인정한다. 인정하는 만큼 냉정하고 냉정한 만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것이 곧 응시. 자신의 응시.

응시만 갖고 소용이 있나?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실제로 체험을 해서 그 응시를 확인해봐야 한다. 바둑에서 필요한 것은 체험을 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쉽지 않다. 그것을 누가 하나? 대개의 경우엔 실력도 약하고 심리적으로도 주눅이 들어있을 터인데 말이다.

그래서 천재가 필요하다. 바둑에서는 천재가 절대로 필요하다. 왜 그런가. 바둑이란 것이 개인 차원의 승부이기 때문이다. 단체대항전이 아니다. 사회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바둑은 1대1 개인의 싸움이다. 그러니 천재는 공동체의 고만고만한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다.

다행히 승부는 공정하다. 그러니 기회가 중요하다, 기회가 있다면 그리고 천재가 그 기회를 살릴 수만 있다면 강박이라는 콤플렉스를 넘어서는 “자각”이 따른다. 앞서 슈코 말씀, “아, 별거 아니구나.” 그것.

그러하다. 천재의 역할은 바둑에서 중요하다. 천재만이 강박을 이겨낸다. 이는 천재의 개념 정의에도 달린 문제이긴 하지만, 바둑의 본질은 천재를 요한다. 우칭위엔이 일으킨 패러다임의 혁명이 일본바둑을 혁신한 것은 그 단적인 예 아닌가.

4. 강박 극복은 개인의 승부가 공동체의 안목으로 변하는 과정

일본에의 강박을 이겨낸 역사는 다음 대국 4개로 요약된다.

5도(1978년 조훈현이 후지사와 슈코를 이겼다)
1978년 후지사와와의 대국은 비록 덤 3집을 부담하는 선(先)으로 두었으나 그 여파는 한국의 자신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대국 내용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흑1이 조훈현의 감각과 실력. 고바야시 9단을 비롯한 일본기사들은 A를 주장했으나 조훈현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백2가 패착이다. 흑3 지켜 흑이 우세하다. 백2, 4 두 수로 얻은 것은 불과 23집.

이 대국에서 조훈현의 태도에는 긴장이 넘쳤다. 초점은 긴장을 이겨낸 것과 내용이 만족스러웠다는 것. 한판의 바둑은 약 250수 이상의 수수가 주는 장기간의 긴장을 이겨내는 과정. 웬만한 실력과 정신력으로는 이겨내지 못한다.

7도(1989년 제1회 응씨배 결승국)
1989년엔 이미 조훈현의 실력과 자신감은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체험은 또 다른 것. 만약 조훈현이 녜웨이핑에게 졌다면 한국바둑의 자부심은 여전히 부족했을 것이다.

백1, 3은 덤8집을 의식한 느린 듯 두터운 수법. 흑4 이후는 백A 이하 흑D까지. 흑이 집은 많으나 백의 두터움과 세력도 깊고 무섭다.(백 9단 攝衛平 : 흑 9단 조훈현)

강박의 극복이 분명해져서 바둑계 모두가 더 이상 일본에 대해 부담을 갖지 않게 된 것은 이창호가 세계대회를 우승한 것에서 확인되었다. 유창혁과 이창호는 문화적으로 일본에 부담을 갖지 않는 세대. 그러니 이창호의 1992년 제3회 동양증권배 우승(대 린하이펑)은 한국의 바둑이 일본에 대해 심리적 부담을 갖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8도(1992년 이창호의 동양증권배 우승)
백1이 맥점. 다음 흑A에는 백이 손을 뺀다. 이후 흑B는 백E까지 흑이 잡힌다. (백 5단 이창호 : 흑 9단 린하이펑)

4개의 대국은 개인의 승부였다. 그러나 공동체는 일인자의 수준을 뒤따르는 경향을 갖는다.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실력과 안목으로 살이 붙는다. 개인의 승부는 공동체의 승부이기도 한 것이다.

5. 강박은 마음을 닫는 것과 같다 - 시스템도 다를 바 없다

실로 얼마나 시간이 걸렸던가.

1945년 이후 40년이 넘은 시간. 2,3천 명의 애기가에서 700만을 운운하는 성장. 그러나 일본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극복했을 때 한국바둑은 실로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일본을 모델로 해서 발전한 바둑이 이제는 스스로 모델을 찾아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 것이다. 모델 없이는 안주하기 쉬운 것.

1983년 「바둑」(5월호)이 방한한 이시다(石田) 9단을 인터뷰했다.

(질문) 계속 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13년 전 타이틀을 딸 때에는 무서운 것이 없는 상승세였다. 그러나 방어를 하다보니 스스로 굳어졌다. 도전자였을 때가 좋았던 것 같다.

(질문) 조치훈 기성의 시대가 얼마나 지속될 것으로 보는가.

(답) 조 기성 자신의 자세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도전하는 마음으로 쳐들어간다면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지키는 입장을 너무 의식한다면 조의 시대는 의외로 빨리 끝날지도 모른다. 선배보다 후배가 도전해 올 때 더욱 힘들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둑에서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발전은 밀접한 것으로, 도전 없이는 정체와 쇠퇴만이 있다. 경쟁이 승부의 내면이라, 경쟁에 대해 마음을 닫아두는 조건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실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한국바둑사 성장의 중요한 모티프로 강박을 들 수 있다면 이제 한국바둑의 위기는 바로 그 성장의 정점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모델이 사라졌을 때 한국바둑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 강박을 넘어서서 일본을 극복했다고 판단한 그 순간이 바로 위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가꾼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로, 일본바둑이 앞에 있을 때에는 그것이 가능했다. 도전이 힘을 준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 콤플렉스가 노력을 불러일으키듯이.

모델이 사라지는 것은 곧 닫힌 시스템이 될 여지가 높아진다는 것.

스스로 자화상을 그려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 모델이 있다는 것은 곧 개방시스템을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자신을 항상 거울에 비추어 응시할 수 있는 것이나, 그 모델이 없다면 곧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강박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으며 어느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하겠다.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구나 어린 시절엔 체력으로나 정신력이 약해서 주변의 환경에 압도된 적 있지 않던가. 닮고자 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대상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노력하지 않던가.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집단의 차원에서나 다를 바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다. 바둑에서 바람직한 제도적 장치는 천재를 길러내는 시스템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심리적인 한계를 이겨내서 반상의 변화까지 가져오는 힘은 천재가 아니고서는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자각은 천재가 누구보다도 잘 하는 것. 자각의 힘이 강하기에 천재에게는 현실이 불안하고 불만이지 않겠는가.

1983년 서봉수가 말했다. “조훈현은 뛰어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에게서 배웠지요. 특히 내가 제일 많이 배웠습니다.”

2007년 이세돌의 이야기도 그렇다. “천재 하나면 되지요.” 다소 과한 표현이나 가볍게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승부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바둑은 기와 예가 강조되는 특별한 세계. 예술의 세계에서는 천재가 안목을 열어젖힌다. 바둑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한국바둑의 제도에 대해 평가를 할 때 제도가 과연 천재를 길러내는 시스템이냐 여부를 보면 될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어떠한가. 현재의 한국바둑은 과연 어떠한가.

이창호는 일본바둑에 주눅들지 않은 세대이다.
1992년 3회 동양증권배 결승5번기에서 린하이펑 9단을 3-2로 물리치면서
한국바둑은 비로소 일본바둑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자료사진/월간바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