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화사자(梅花使者)를 기다리며

1851년 8월 22일이었다. 63세의 한 초라한 노인이 가족과 이별을 하고 있었다. 한양에서 남해의 임자도(荏子島)까지 유배형을 떠나는 이 노인의 눈은 흐릿했고 정신은 멍멍했다. 이 노인의 이름은 조희룡(1789-1866). 우봉(又峰) 또는 호산(壺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화가이자 문인으로, 그리고 바둑에 조예가 깊어 김종귀라는 바둑고수의 전(傳)을 쓰고 바둑기보 등의 이름과 바둑에 대한 탁견을 여러 편 피력한 이 땅의 최초의 바둑평론가라 해도 부족함이 없던 사람이다.

조희룡은 보름여를 걸어 전라도 영광땅에 이르러 배를 탄다. 배를 타며 조희룡은 절망을 한다.
 

울며불며 자식 손주들 가을 물가에 /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별은 마음 상하는 것.

고개를 떨구니 갈매기도 조소를 하고 / 부끄럽게도 남쪽땅의 한미한 사람되었도다.
 

조희룡의 무너지는 억하심정이 역력하다. 그는 유배형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추사 김정희의 막하(幕下)로 손톱이나 복심(腹心)이기에 김정희의 유배형에 함께 처벌을 했다는 조정의 조치가 못내 억울했다. 이날 김정희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었다.

조희룡은 화가이자 문인인 탓에 당대 문원(文園)의 좌장 김정희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러나 김정희의 그에 대한 평은 야박하다. 문자향이 없는 그림이란 것이다. 김정희와의 인연으로 유배를 온 조희룡의 섬 생활은 지옥이다. 의식주를 자급자족해야 하던 유배생활을 가난한 그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조희룡은 고독과 굶주림의 나날을 보내며 조금씩 섬과 친해진다. 십여 일을 생선 한 토막 구경하지 못하고 비린내 낭자한 섬사람들 젓갈(?) 한 점 맛본 게 전부라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같은 섬에 유배를 와 있던 우모라는 사람과 수석을 모으고 마을사람들과 교분을 나누며 생도와 맞서는 방법을 배워간다.

조희룡은 이곳에서 많은 시와  편지를 쓴다. 부칠 인편 없고 노자도 없는 일이었지만 고독을 달래는 방편은 되었다.

조희룡은 이팔원(李八元)을 생각했다. '벽오사' 동인으로 시 짓고 바둑두고 그림 그리던 친구들 모임의 멤버였다. 조희룡의 그림 중 '유최진'와 '이기복'이 바둑을 두고 내가 그것을 그렸다는 화제가 있는 작품이 있기도 하다.

바른말 말하지 않아 혀는 굳어 있으나 / 한 장의 편지는 과연 문장이로다.

가시나무 아래서 지고 이기던 바둑 / 팔짱 낀 사람들 지켜보고 있겠지.

(不講淸論舌本强/一書終抵珪璋/珊瑚樹下輪瀛局/袖手何人却在傍)
▲ 조희룡의 그림

 

맑은 댓자리 드려놓은 발 아래서 바둑 착수 못하고 / 아침이 환하게 밝아도 자리에 앉아 머리를 만지네/

거미줄 위에 낙조가 걸리 듯 마음 아득하건만 / 아, 어제 짓다만 매화시도 있었지.

(淸蠶疎簾不着棋/崇朝孤座燃撫髮/蛛絲碧落心惟遠/昨有梅花未了詩/)
                               

대돗자리에 발을 쳤다니 여름이었던 모양이다. 착수를 못하고 아침을 맞은 바둑이라 했으니 바둑으로 밤을 새운 것이다. 바둑판 위에 거미줄이 처진 듯 벽에 낙조가 어린 듯 오리사리 하니 마음이 정돈될 일이 아니다. 졸리고 바둑은 이길 방법 없는데 갑자기 어제 짓다만 매화시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주사벽락'은 바둑으로 야통(?)을 해본 사람이면 모두 아는 일이다. 19로 줄이 늘어났다 줄어들고 바둑알이 스스로 움직이는 착시현상 말이다. 한판 바둑과 한수를 생각하며  날을 새울 정도의 기력이라면 필경 고수다. 조희룡은 임자도에서 바둑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토로한 바도 있다.

해국(海國)에 가을이 깊어 갈 때 '소동파'의 시를 읽다가 책 속에 동파의 초상화가 있어 그것으로 족자를 만들었다. 백학관기(白鶴觀碁)를 일고 홀연히 깨달은 것이 있어 시를 한 수 짓고 화상찬(讚)을 대신한다.

선생의 삿갓 아래의 눈은 바다마냥 넓어 / 당대에 천고의 일을 살피네 / 백학관에서 바둑 보던 눈은 /

오늘도 두루 막힘이 없을 터 / 바둑수 보듯 묘리가 있어 / 여유롭게 놀수가 있는 법 /

이겨도 즐겁고 져도 기쁜 것 / 이 말은 천고에 명문이로다 / 이 두 구절 가히 오천문(량)에 해당하니 /

이 마음이 있기에 저 마음이 있듯 / 족함을 알면 오래도록 살 수 있지 / 선생의 문자는 천지와 더불고 /

붉은 바다의 장엄과 견줄 만하네 / 사람마다 각기 표주박을 들고 와 / 모두 한 끼 공양으로 족하지만 /

원래 불가에는 많은 제자 필요 없는 법 / 향 꽂고 절하며 가르침에 기뻐하도다.

백학관기는 조선시대의 문인이나 화가라면 응당 극복해야할 화두(話頭)였다. 문인 모두가 백학관기를 시로 지었고 화가라면 그것을 화제로 한 그림 몇 점씩은 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조희룡은 백학관기에서 다음 두 구절을 생각해 냈다.

바둑에 묘리가 있어 여유롭게 놀 수 있다.

이겨도 즐겁고 져도 기쁘니 이 말이 천고의 진리다.

그렇다. 조희룡의 이 말은 삶의 초극과 달관을 말하는 것이다. 3년여의 절해고도의 생활 속에서 그가 깨우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대하는 법, 바로 그것인 것이다.

조희룡은 유배에서 풀려나 10년여를 더 살게 된다. 그는 '석우망년록' '호산외기' '일석산방소고' '우해악암고' 등의 저술을 남기고 77세의 나이로 명을 접는다. 조희룡은 임자도에서 멀리 마주보이는 고금도를 바라 보며 2백년쯤 후에 매화사자(梅花使者) 왔다갔음을 알아달라 했다.

(2편 이세돌과 비금도는 다음호에)

조희룡이 살던 집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