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張飛)에서 달마(達磨)까지-

오후 7시. 평범한 회사라면 층마다 부서마다 하나, 둘씩 소등할 시간. 홍익동 한국기원 3층 사무국의 직원들은 야근이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 퇴근했을 텐데 2층 대회장은 여전히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

이런, 연일 사상 최고치를 갱신중인 고유가 시대라는 걸 모른달 말인가. 저렇게 넓은 대회장에 불을 켜둔 채 퇴근하다니.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건 오해다.

2층 대회장으로 들어서면 대형 모니터 세 대를 앞에 두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은 프로들의 열띤 검토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아니, 이 시간에 무슨 검토? 프로들도 야근을 하나?  맞다. 야근이라면 야근. 한국바둑리그가 개막된 이후 익숙하게 자리잡은 한국기원의 저녁풍경이다.

한국바둑리그의 꽃은 소속팀의 명예를 걸고 전, 후기 개인 14국, 총합 245국의 대회전(大會戰)을 펼치는 젊은 프로들이 분명하지만 초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4~5시간을 몽땅 투자한 팬들의 눈은 그들에게로만 향하지는 않는다.

TV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스타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로 팀에 기여하며 한국바둑리그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국바둑리그 출전 8개 팀의 감독. 그들은 스스로 화려하게 빛나는 1등성이 아니다. 늘 가까운 곳에서 작은 빛으로 리그의 밤하늘을 더욱 아름답게 밝혀주는 그들은 ‘숨은 별’이다.

각각 2승 1패로 리그 공동2위를 달리는 ‘월드메르디앙’과 ‘한게임’의 이틀째 경기가 속개된 5월 23일 오후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하루 전 원성진(1지명), 박정환(6지명)이 나란히 승리를 거둬 단독2위를 눈앞에 둔 월드메르디앙의 검토 좌석으로 ENG카메라가 돌아가고 그 뷰파인더에 선수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장수영 감독의 얼굴이 비친다. ‘감독열전’의 첫 주자다.

상금규모, 지역연고제, 단장, 감독까지 제대로 갖춘 프로바둑리그다운 리그의출발은 ‘2006 KB 한국바둑리그’라고 할 수 있는데 장수영 감독은 그 원년부터 3년 연속 월드메르디앙 팀을 지키고 있는 ‘원조 감독’이다.

손종수(이하 손)- 올해는 각 팀이 선수 선발부터 예년과 다르게 상당히 전문적인 시각으로 응해 각 팀의 전력 차가 크지 않다는 평가인데 장 감독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전기리그 4회전이 진행중인 지금 팬들의 체감은 ‘2강(제일화재, 월드메르디앙) 4중(영남일보, 신성건설, 울산디아채, 한게임),  2약(Kixx, 티브로드)’입니다만···.

장수영(이하 장)- 그렇습니까. 좀 뜻밖이네요. 사실, 1강은 선수 선발식이 끝난 뒤 바로 알았죠. 그건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겁니다. 전, 그 나머지 팀은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요. 팬들은 성적에 민감하니까 현재 드러난 팀들의 전적으로 그렇게 평가하는 거겠죠. 그건, 리그 초반이니까 좀더 지켜봐야겠고···. 역시 제 생각은 1강을 제외하곤 다 비슷비슷하다는 겁니다.

사실, 관계자들은 개막 전에 ‘3강(제일화재, Kixx, 월드메르디앙) 5중(영남일보, 신성건설, 울산디아채, 한게임, 티브로드)이 미세한 전력 차로 치열한 혼전을 벌일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었는데 초반부터 전년도 우승팀이었던 영남일보가 거푸 고배를 마시고 이창호, 박정상 투톱이 지키는 Kixx가 예상외의 고전으로 부진을 보이는 이상기류가 흐르면서 팀들의 전력평가도 크게 바뀌었다.

손- 물론, 모든 팀의 목표가 우승이고 월드메르디앙 역시 다르지 않겠지만 어떻습니까. 감독님이 생각하는 월드메르디앙은.

장- 선수 선발에 최선을 다했으니까 팀의 전력에 만족합니다. 모두 좋은 선수들이죠. 그렇지만 제일화재가 워낙 강팀이에요(웃음). 우리 팀의 1차 목표는 4강입니다. 일단 4강에 들고나서 전열을 가다듬으면 우승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손- 그렇군요. 2006년 KB한국바둑리그부터 감독제가 시작됐는데요. 감독제 원년부터 3년 연속 한 팀을 지켜온 감독으로서 그 역할과 기여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처음 시작할 때 별 의미 없는 형식 갖추기에 불과하다는 말이 많았거든요. 그러다가 지난 해죠, 영남일보 최규병 감독이 꼴찌 팀을 일약 우승팀으로 이끌면서 감독의 역할이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장- 감독제에 대해서 처음엔 말이 많았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감독의 역할, 중요하죠. 좋은 선수를 선발하기만 하면 다 끝나는 게 아닙니다. 팬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지만 팀을 위해서 할 일이 많습니다. 대국 오더를 작성할 때도 상대 팀 선수와의 전적 데이터를 살피고 선수들의 대국당일 컨디션을 체크합니다. 또 팀 전체의 화합을 이끄는 일도 감독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손- 오더는 직접 혼자서 짜시나요? 아니면 선수들과 협의를 거치는지···.

장- 선수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지만 제출하는 최종 오더는 대부분 저 혼자 짭니다. 대국 전날까지는 상대팀 선수들의 기보를 분석하게 하고 상대전적을 체크합니다. 저쪽에선 누구를 1장으로 내보낼지, 장고대국엔 누가 나올지 다 생각해야죠. 대국당일 선수들의 컨디션이 흩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화합을 중시하는 장 감독이지만 오더를 짜는 데는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선수는 오로지 대국에 전념하는 게 좋다. 감독은 선수들이 상대 선수들의 기보를 신속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돕고 ‘궁합이 맞는(전적, 기풍, 취향 등에서 이쪽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상대’와 겨룰 수 있도록 골머리를 싸매는 오더 작성은 감독이 한다는 철저한 역할분담을 이야기한다.

손- 한 무리를 이끄는 장수의 개성을 이야기할 때 지장(智將), 덕장(德將), 용장(勇將)의 세 분류로 나누어 구별하는데 감독님의 경우는 어떤 쪽을 지향하십니까.

장- 글쎄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제가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약간 쑥스러운 표정이다) 굳이 선택한다면 ‘덕장’입니다. 저는 조직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화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월드메르디앙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들간의 화합이죠.

화합? 그러고 보니 오래 전 일이 생각난다. 장 감독은 바둑이 대한체육회 인정단체로 막 걸음마를 시작했던 2003년 10월 제84회 전국체전 어린이바둑대회 단체전에 제주팀 감독으로 출전한 적이 있다. 그때 인상 깊은 기억 하나. 행사 장소 부안에는 어린이들과 감독들의 숙소가 따로 있었는데 딱 한 사람 장 감독만은 감독들의 숙소를 사양하고 제주팀 어린이들과 같은 숙소를 이용했다.

자세히 듣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장 감독은 비록 짧은 하룻밤이라도 전국 각지에서 집결한 어린이들의 부모를 대신하는 보호자 역할과 이튿날 아침 대회에 출전할 어린 선수들과 한마음이 되는 감독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용서하시라). 지금은 많이 누그러진 표정이지만 사실, 장 감독의 외모는 ‘덕장’이라기보다 ‘용장’ 또는 ‘맹장(猛將)’에 가까웠다. 그건 여기서 주장하지 않아도 팬들이 만들어준 젊은 시절의 별명이 그 진실성(?)을 웅변해준다. 그는 장팔사모를 휘두르는 ‘장비(張飛)였다.

손- 오랫동안 ‘장비’라고 불려왔습니다. 팬들이 만들어준 애칭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마음에 드시는지?

장- 하하하. 제 외모가 우락부락하잖아요. 그리고 젊은 시절엔 성격도 급했고 바둑도 좀 사나웠습니다. 그러니까 팬들이 자연스럽게 ‘장비’를 연상한 거 같아요. 저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니까 고마운 일이죠. 마음에 듭니다.

사실, 가까운 사람들이 아는 장 감독은 외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외강내유(外剛內柔)하다고 할까.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거친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곡선이 연상된다. 호방하다기보다는 섬세한 사람이다. 이러니 ‘용장’보다는 ‘덕장’이나 ‘지장’을 지향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알고 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장 감독의 외모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 장비가 섬세하다고?’라거나 ‘장비가 무슨 덕장이야!’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다 ‘선입견’이라는 얘기다.

손- 프로라면 누구나 타이틀홀더의 꿈을 가지고 있을 텐데 장 감독님은 준우승만 꽤 여러 차례 하셨죠. 2004년 돌씨앗배 우승이 있긴 합니다만 승부사로서의 아쉬움도 제법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장- 아쉬움,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조훈현, 서봉수를 이겨내지 못했으니까요. 최선을 다했으니까 후회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죠.

조훈현, 서봉수와 여러 차례 격돌했다는 것은 정상의 무대까지는 밟아봤다는 뜻이다. 다만, 그들을 넘어서지 못했을 뿐. 그는 ‘도전5강’의 일인으로서 ‘타도 조훈현’의 기치를 들어올렸지만 77년 최고위전부터 왕위전, 제왕전, 박카스배, 동양증권배를 거쳐 93년 SBS 연승전에 이르기까지 약 20년간을 ‘준우승’의 조연으로만 머물렀다. 2004년 돌씨앗배를 통해 우승의 염원을 풀긴 했으나 20년 준우승의 아쉬움을 말끔하게 씻어내기에, 시니어로 제한된 기전의 우승은 그다지 흔쾌하지 않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연륜이 쌓이듯 자연스럽게 장 감독의 별명도 진화했다. 요즘 장 감독의 팬들은 그를 ‘달마(達磨)’라고 부른다. 이건 또 뭔가. 달마라니. 후한(後漢) 말 촉(蜀)의 오호장군에서 300년쯤 내려온 북위(北魏)시대 선종(禪宗)의 창시자라니.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어째서 이런 별명을 갖게 된 걸까.

장- 젊은 시절에는 바둑이 사나웠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좀 부드러워졌죠. 항상 초반이 안 좋아서 중반 이후에 역전시키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포석 공부에 공을 들이고 애를 많이 썼는데 그래도 잘 안 되더군요.

조급하고 사나운 초반을 가다듬어 정상에 올라서려고 노력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노력은 바둑판 위의 승부보다 삶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둔 것 같다. 오호장군 장비가 참선을 거듭해 선승 달마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요즘의 장 감독은 과거에 비해서 확실히 그런 일면이 보인다. 젊은 프로들과 바둑을 검토하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여유가 있다. 표정이 온화하고 목소리도 나지막하다. 하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게 딱 하나 있긴 하다. 오호장군 ‘장비’든 선승 ‘달마’든 그 외모는 용맹스럽다는 것.

손- 장 감독님은 어린이바둑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전국바둑교실협회(이하 전바협) 곽규상 회장님의 말입니다만 전바협의 주요 바둑행사는 물론, 숙원사업 중 하나인 체육시설법에 관련된 일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어린이바둑에 특별히 신경을 쓰시는 이유라도 있으신지.

장- 저도 바둑도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제가 도장을 운영하거나 어린이바둑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프로무대에서 타이틀홀더가 되지 못한 아쉬움을 인재육성으로 풀어보겠다는 생각이지만 보다 큰 이유는 바둑관계자라면 누구나 어린이바둑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바둑의 저변이 넓어지고 뿌리가 튼튼해져야 프로바둑, 나아가 한국바둑 전체가 융성해지는 것이니까요.

누군가 저에게 프로가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 둘째, 재능을 타고나 최고의 기사가 되는 것. 그리고 셋째는, 뛰어난 인재를 거둬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무사독학(無師獨學)에 가깝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날 기회가 없었죠. 게다가 재능도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 없어요. 이미 두 가지의 즐거움은 놓친 셈입니다. 그래서 남은 한 가지만큼은 꼭 해내고 싶어요. 제자를 육성하는 일. 그저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바둑도장을 잘 운영해서 제자들에게 바둑도장까지 물려주고 싶습니다.

이제야 알겠다. 많은 사람들이 ‘장수영은 욕심이 많다’고 하는 이유를. 다른 의미의 거부감도 더러는 있겠지만 ‘욕심이 많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한 가지 그 욕심의 지향점은 넓고 큰 선의(善意)라는 것. 그것을 알겠다. 큰 길을 걷는 사람은 작은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장수영은 남다른 ‘프로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 나이 50을 넘어선, 전성기를 훌쩍 지나버린 프로기사도 팬클럽을, 그것도 아주 열렬한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고른 팬들로 구성된 팬클럽을 가질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준 사람은 박수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는 오늘도 바둑도장의 호랑이사범님으로, 바둑TV의 노련한 해설자로, 어린바둑대회의 초청인사로 분주하다. 그 분주함 속에는 ‘2008 KB한국바둑리그’ 월드메르디앙 장 감독의 얼굴도 존재한다.

‘不斷克己而向前’. 끊임없이 자기자신과 싸우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그는 최고의 프로가 아니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사람의 얼굴은 최고의 얼굴과 다르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보여준 장수영은 분명 최고의 프로다.

‘좋은 인재를 모아 가르치고 바둑도장까지 물려주고 싶다’는 그의 환한 마음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