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소설
19세의 그랜드마스터
2005-08-29     프린트|스크랩


며칠 전 19세의 체스마스터란 인물이 한국기원을 찾았다.
아! 그냥 마스터가 아니다 ‘그랜드’마스터라고 했다. 체스에 문외한인 양실짱으로선 ‘그랜드’란 이름이 붙으면 얼마나 ‘그랜드’한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대단히! 몹시! ‘그랜드’한 존재라고 한다. 바둑으로 치면 9단 중에서도 ‘엑기스 9단’이라고 하는데 ….

몇몇 신문에도 실린 연유로 그의 방한 소식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 분들도 계시리라. 러시아에서 날아온 19세의 한국계 체스명인.
김 알렉세이. (알렉세이 킴이 아니다. 러시아는 성을 앞으로 뺀다고 한다)

빗줄기가 언뜻언뜻 비치는 오후, 한국기원 4층 회의실(원래는 노조사무실이다)에서 조촐한 기자회견이 있었다.
참석자는 주인공 김 알렉세이 군과 아버지, 그리고 체스 관계자 몇 명. 마주 편엔 기자들이 포진했다.

한 호흡 고른 뒤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됐다. 제일 먼저 입을 뗀 기자는 동아일보의 서정보 기자.

Q. 한국엔 처음 오신 건가요? (아아 … 진부한 질문이다. 그러나 꼭 필요하다. 열심히 받아 적는 양실짱)
A. 7년 전에 한번 다녀간 일이 있습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매번 새롭다는 점이지요. 한국 … 참 좋은 느낌입니다. ( … 라고 유창한 한국어로 ‘통역’이 대변해 주었다)

Q. 그랜드 마스터가 뭡니까? (이건 다른 기자 질문)
A. 현재 약 5, 6억 정도 되는 인구가 체스를 즐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중 만 3천 명 정도의 마스터가 존재합니다. 마스터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데 그랜드마스터는 그 중 가장 높은 레벨이죠. 그 밑으로는 인터내셔널 마스터, FIDE(세계체스연맹) 마스터 등이 있습니다. (양실짱 : 우리나라에는 몇 명의 마스터가 있나요?) 으음 … 한 명도 없습니다. 일본에는 인터내셔널 마스터가 한 명 있죠.

Q. 이번에 방한한 목적은?
A. 한국 체스 관계자분들께서 초청해 주셨다. 이번에 책(김알렉세이로부터 배우는 체스 - 전원문화사 간)도 내서 홍보차 방한했다. 또한 이번에 한국 국적 취득 문제도 있고 해서 ….

Q.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자 하는가?
A. 그렇다. 한국인이 되고 싶다. (이유가 있다면?) 한국대표로 국제체스대회에 나가고 싶다. 체스는 내년 카타르 아시안 게임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하게 되면 좋겠다.

(이 얘기는 조금 덧칠이 필요할 것 같다. 일단 김 알렉세이 군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겠다. 김 알렉세이의 증조부는 함경북도 나진 출생으로, 할아버지 때에 러시아 타슈켄트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케이스이다. 아버지는 모스크바 고려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따라서 김 알렉세이는 한국계 3세가 되는 셈.
김 알렉세이는 바둑을, 아니 체스를(^^;) 할아버지한테 배웠다. 4살 때의 일이다. 이 할아버지가 당시 타슈켄트 체스 챔피언이었다고 하니 우리로 치면 국수는 아니고 도기(道棋)나 면기(面棋) 정도 되었던 모양이다.
이 할아버지께서 몇 년 전 돌아가시며 유언을 남기셨다 한다. 그 유언이란 …

“알렉세이야 … 쿨럭 쿨럭 … 나는 네가 조국 대한민국의 국가대표가 되어 국제 체스대회에 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란다 … 이제 그 모습을 살아서 보기는 힘들겠지만 … 내가 죽더라도 부디 이 할애비의 소원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

이 말을 할 때 알렉세이 군의 눈가는 축축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할아버지는 조부이자 첫 스승이었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일류 스승 한 번 만나보지 못하고 그랜드마스터에 오른 알렉세이. 그러고 보니 상당히 대단하다.)

우리는 체스를 잘 모른다. 하지만 카스파로프란 이름 다섯 자(음 … 원래는 다섯 자가 아닐 것이다)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몇 년 전인가, ‘딥블루’인가 하는 슈퍼컴퓨터랑 맞짱을 떠서 완패를 당해 체스인들을 지극히 당황케 만들었던 체스의 최고봉. 최근 은퇴를 했다고 하나 그는 여전히 체스계의 전설이자 실질적 랭킹 1위라고 하는데 ….

여기서 다시 질문.

Q. 카스파로프를 아는가?
A. 당연히 알고 있다. (대국을 해 봤나?) 아니, 그랜드마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쉽게도 아직까지 세계 최강자들과는 겨뤄보지 못했다. (둔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흐음 … 아직은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이 있다면 … 자신 있다. (-_-+ ← 이 말을 하는 알렉세이 군의 눈빛이 이랬다)

Q. 카스파로프가 컴퓨터에게 패한 사실은 알고 있는가?
A. 물론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컴퓨터는 기계다. 실수와 착각이 없고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결국 컴퓨터도 사람이 만든 것이다. 나는 카스파로프의 실력을 믿는다. (바둑인들로서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실수와 착각이 없고 피로를 느끼지 않는 딥블루 슈퍼울트라캡숑 버전이 나온다한들 별 게 없지 않을까 싶어서 … 이창호(바둑계의 카스파로프)로 직행하기에 앞서 일단 한국기원 연구생들과 일전을 … 아니, 오로 7단들과의 시험기를 통과한 뒤 …)

Q. 본인이 딥블루와 한판 붙는다면?
A. (이 장면에서 알렉세이가 웃었다. 처음 웃었다. 웃으니 꽤 순진한 얼굴이다) 나도 컴퓨터랑 가끔 대국을 한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슈퍼컴퓨터라 … 아직 준비가 완전하지 않다. 완전한 준비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 이길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아버지가 거들었다.

“딥블루는 세계적인 슈퍼 컴퓨터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대국을 이미 입력해 놓고 있는 상태인 데다 계산이 빠르다.”라고.

(으음 … 그래봐야 기자석의 기자들 - 주로 바둑 담당 기자들이다 - 의 얼굴은 ‘과연 그럴까?’이다. 셀 수 없을 만큼 기보를 입력해 봐야 어쩌자는 건가? 계산이 빠른 거야 당연한 일이고 … 으음 … 아직은 아니다. 정 자존심이 꿀리면 언제라도 좋으니 딥불루와 오로 7단들과의 친선 대국을 …^^)

Q. 요즘 우리나라도 체스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들었다. 과연 본인이 생각하기에 체스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A. 전투적인 것이다. 그리고 창조적인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의 희열감. 그리고 이건 좀 미묘하지만, 상대에게 심하게 패배를 당했을 때의 좌절감이다.
(멋지긴 하지만 마지막이 좀 어떨지. 상대에게 심하게(만방) 당했을 때의 좌절감이 매력이라 … 으음 … 흐음 …)

마지막으로 물었다. 체스가 빨리 늘려면?

“무엇보다 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욕망을 뒷받침하는 시스템, 즉 좋은 코치와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잠깐! 통역이 잘못 전달한 것 같은데, 내가 질문한 것은 ‘프로가 되려면?’이 아니고 그냥 처음 배우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빨리 숙달할 수 있는지라고!!)

진짜 마지막으로 누군가 물었다. 동아일보 서정보 기자였을까? 아니면 연합신문의 왕길환 기자? 어쩌면 양실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음식 중에 좋아하는 것 있어요?”

그러자 김 알렉세이가 환하게 웃는다. 그리곤 이날 회견 중 유일한 한국말을 들려 주었다.

김 ・ 취 ・ 치 ・ 궤

“오케이! 김치찌개는 다음에 먹기로 하고 오늘은 갈비나 뜯으러 갑시다.”

모두들 흔쾌히 일어서 식당으로 향했다. 고기를 굽는 부연 연기 속에서, 김 알렉세이는 행복해 보였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 보였다.
소주 한 잔 권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아 아쉬웠다.

눈이 날카로웠지만, 입을 열면 후덕해 보이던 아버지의 말이 얼핏 들려왔다.

“지금까지 알렉세이는 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랜드마스터가 되면서부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혈연적으로는 나의 아들이지만, 이젠 한국의 아들입니다. 조국에서 알렉세이의 용기를 북돋워 주어 한국을 빛낼 수 있는 재목으로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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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뒨 |  2005-08-29 오후 4:13: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멋있다! 역시 폼생폼사..바둑도 품위를 좀 올리면 어떨까요?  
오희 |  2005-09-01 오후 5:18: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실명으로 이름이 박히고...그나 저나 진부한 질문을 한 기자가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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