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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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산발적인 웃음과 함성이 어우러진 평소 강의실의 분위기와는 달랐다.
마치 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살금살금 몸을 떨듯, 묘한 긴장감이 주위를 감도는
것 같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업 시작 시간이 되어서도 교수님이 들어오시지 않
은 것이다. 혹시 휴강인가…?

그런 중에 내 시야에 들어온 한 친구는, 벽과 천장 사이에서 움직이는 시곗바늘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휴강이라면 좋겠어. 딱 오늘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거든.”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친구, 이형. 성이 이 씨라서 이형이라 부른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괴짜다. 선배들은 그를 두고 '교실 한구석의 슬픈 오브제'라고 불렀다. 철없는 내 동기들이 이형에게 그게 뭐냐고 묻곤 하면, 그는 “예술 감각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며 늘 면박을 주었다. 그냥 답해 줄 수도 있으련만. 나 역시 똑같이 물어본 까닭에, 친히 그에게서 오스카 와일드와 진중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글쎄, 미학을 공부하라나 뭐라나?

“중필아, 미의식과 예술감의 부재는 그 인간을 답답하게 한다.”
평소 독특한 말투로 설교하는 그에게 나는 기묘한 반감을 느꼈다.

“나를 두고 하는 소리니?”
“배운 자만이 자유롭거든.”
나로선 도무지 그 지식을 측량할 수 없는, 그가 배운 만큼 도량이 넓었더라면…
지식과 관용이 꼭 비례하지는 않는 거로구나, 나는 오히려 그를 통해 배운 셈이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이제 수업보다는 이형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겠다고 난 결심한 것이다.

“이봐, 그 아이디어가 뭔데?”
“번득이는 악상이라구."

이미 수업을 포기한 나로선 그의 생각을 듣고 말아야만 했다.

“바둑에 관한 아이디어야?”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물었다.

“그래, 바둑에 관한 거야. 먼저 한 가지 질문. ‘사람의 인생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과의 대결’이라는 명제에 공감하니?”
“흐음. 뭐, 공감.”

“그렇담 ‘바둑은 첫수부터 마지막 수까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라는 명제에는?”
“당연한 말이잖아. 반전무인(盤前無人)이라는 바둑용어도 있고.”

“그래! 한마디로 인생과 바둑은 닮아 있어. 맨 먼저 자기 자신을 알고 적을 알아
승리해야 하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바둑은 마음을 다스리고 자기 수양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난 생각해. 자신의 정신력을 발휘하여 최대의 기량을 펼치는
바둑, 점점 스포츠화 되어 결과만을 중요히 여기는 현실이 안타까워. 단순히 재미와 오락성, 그리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실속에 중점을 둔 바둑 가맹단체의 '실착'일 테지.”
이형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이미 오늘날의 추세가 그렇잖아. 그럼 넌 바둑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데?”
나는 그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교육, 산업, IT, 문학 등, 바둑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아. 다만 난 바둑으로 모든 분야를 협연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우리 삶의 본질적인 문제까지도 탐구해보고 싶고. 이를테면 ‘바둑을 통한 인간 양성’ 같은 걸 말이야. 너도 느낄 테지만, 요즘은 인간이 인간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는 충동이 여러 군데서 보이잖아. 폭행이나 살인, 그 외 온갖 사건 사고들이 난무해. 사르트르라는 철학자의 말대로 인간이 대자적 존재임을 스스로 부정해서 조약돌과 같이 의식이 없는 상태로 하강하는 꼴이야. 난폭하고 잔인한 사건 사고들, 거기에서 인간의 정상적인 의식을 발견하기란 어려워. 바로 의식의 고전적 훈련인 바둑으로 인간을 개선하는 세상! 내가 바라는 단 한 가지야.”
요즘 들어 체형이 부쩍 마른 이형이 안경 너머 예리한 눈매를 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