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바둑문화상 공모 3개 부문 중 당선고료(500만원)가 가장 많은 중장편 소설부문에서 당선작을 낸 이경호 작가가 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로부터 최우수상을 받는 모습. |
한국 현대바둑은 광복 70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70년과 궤를 같이 한다. 70년을 꽉 채웠다.
인간 나이 칠순(70세)을 고희(古稀) 또는 종심(從心)이라 한다. 종심은 공자(孔子)가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고 한 데서 유래한다. 지난 70년간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과정을 거쳐온 한국바둑이 이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종심’을 행하는 시기를 맞았다. 여전히 시행착오를 거칠 테지만 수없는 경험으로 얻은 교훈을 시금석 삼아 제2의 한국바둑을 펼칠 때다. 현대바둑 70년이 재정립을 하고 미래바둑 70년을 여는 원년이다.
고희연(古稀宴)에 기억에 남을 특별이벤트가 없을 수 없다. ‘바둑문학상’ 작품공모는 그 중 하나다. 기자가 아는 한 바둑계에 이번처럼 제대로 공모전을 한 적이 없다. 총 고료로 1,300만원을 걸었다.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공모기간에 수필부문 98편, 단편과 콩트부문 37편, 중장편 소설부문에 24편이 쇄도했다. 최고 고료가 500만원(중장편 부문 최우수상)인 걸 헤아린다면 총 159편의 응모작은 적지 않은 편수다. 바둑이라는 특수분야의 공모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열기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수상자 중 한명은 “최우수상에 1,000만원쯤 걸었으면 심사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작품이 몰렸을 것”이라고 말하며 공모전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바랐다.
○● 바둑문학상 수상식 뉴스 ☜ 클릭
시상식 후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당선자 몇 분과 얘기를 나눴다.
▲ 중장편 소설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경호 작가.
중장편 부문 최우수상 <두터움에 대하여> 이경호 씨
중장편 부문은 총 고료 1300만원 중 700만원이 걸린 부문이다. 최우수상 상금이 500만원이니까 대상인 셈이다. 전북 익산에서 학원 국어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경호(44) 씨가 <두터움에 대하여>란 작품으로 최고상을 받았다. 사이버오로 초창기 회원이어서 더 반가웠다.
- 문학공모전에서 이것 말고 입상한 적이 있으신가?
“지방 공모전에서 중편으로 2번 당선한 적이 있다. 등단이라고 할 것(수준)까지는 아니고...바둑처럼 특수한 분야는 처음이다.”
- 인터넷바둑사이트에서 7급 두는 기력이면 초심자는 아니지만 고수와는 거리가 먼 수준이다. 특히나 ‘두터움’이란 분야는 프로급 고수도 제대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이걸 소설의 재료로 삼았다.
“글을 쓰기 전 바둑용어에 대한 공부부터 했다. 정확한 용어 숙지를 위해 한국기원에서 낸 [바둑용어사전]을 섭렵했다. 이 과정에서 ‘두터움’이란 용어가 확 다가왔다. 인간관계 자체가 두터워야 된다는 데 기조를 둔, 그러니까 가족이나 부부, 모든 사람과 맺는 관계가 얕아서는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가 없다. 외부 공격이 들어와도 쉽게 접근할 수 없고 쉽게 막아낼 수 있는 게 ‘두터운 관계’다. 이런 걸 말하고 싶었다. 부족한 작품이었는데 심사위원 선생님이 좋게 봐주신 듯하다.”
성석제 심사위원은 “<두터움에 대하여>는 바둑이 중요한 코드이긴 하지만 가족과 노인문제, 사랑과 어린 시절의 상처에 이르기까지 공감이 가는 많은 이야기를 함축성 있는 표현과 문장으로 잘 담아낸 출중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 수필부문 최우수상(100만원 고료)과 단편콩트부문 우수상(100만원 고료)으로 2개 부문에서 수상한 김학수 작가는 "고료 200만원 중 반은 응원하신 사모님께 드려야겠네요?"라고 하자 "전액 다 줘야지요"라며 활짝 웃었다. 한국기원 앞에서 축하하러 온 아들과 함께.
수필부문, 단편·콩트부문 2관왕, 김학수 씨
수필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둑과 미시세계>의 작가 김학수(77) 씨와 단편·콩트부문 우수상 <공자, 내기바둑을 두다>를 쓴 김두겁 씨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심사가 끝난 뒤에야 알았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심사위원은 작가의 이름이 가려진 원고를 보고 선정했다. 김두겁은 김학수 씨의 필명이란다. 다른 한 부문까지 모두 3개 부문에 응모하여 2개 부문에서 개가를 올렸다.
- 늘 바둑을 즐겨 그런지 정정하시다. 바둑은 언제 배웠는지?
“대학다닐 때 배웠다. 고 강철민 9단이 동문이다. 난 사범대 물리학과를 다녔고 그는 상대를 다녔는데 그때 영향으로 바둑을 알게 됐다.”
- 강철민 9단과 동문이면 서울대를 나와 교편을 잡으셨나 보다. 바둑도 고수일 듯하다.
“부산대학교에서 2003년 정년퇴직했다. 바둑실력은 형편없다. 우리끼리 모이면 1급이라고 자처하지만 1급층이 얼마나 두터운가. 오로에서는 6단을 둔다.”
- 평소 글을 쓰셨나 보다.
“관심이 있었다. 정년퇴직을 하며 인생 1막을 끝내고 글을 쓰며 2막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문단 공모는 엄두도 못냈고, 다만 내 나름 계속해서 장편 하나는 만들었는데 두 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 덮어 놓고 의기소침해 있는데 한국기원 홈페이지를 보고 3개 부문 출품작을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어? 이 어른들이 선정해 줬네? 운이 좋았다. 특수분야(바둑문학공모) 영역이기는 하나 어느 정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명분 있는 단체에서 선정해줘 더 이상 기쁠 수 없다. 쓸 수 있는 데까지는 바둑글을 더 써볼 작정이다.”
▲ 단편콩트부문 최우수상은 대학생 강승체 씨가 받았다.
최연소 수상자, 카이스트 생 강승체 씨
단편·콩트부문 최우수상 <아일랜드>를 쓴 강승체(23) 씨는 카이스트 재학생이다. 아마5단의 실력으로 고향인 부산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동네 바둑교실에서 배웠다고 한다.
-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국문학도도 아니고, 글과는 거리가 먼 듯한데?
“공부는 못해도 글쓰는 거는 무지 좋아한다. 대학 진학 후 등단과 관계 없는 공모전에 한번 당선된 적이 있다.”
- 명문 수재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학교에서 바둑과 접할 시간이 있나?
“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바둑수업이 있다. 박우석 교수님이 1주에 2번 강의하신다. 바둑동아리 ‘맥’에서 활동하고 있다.”
박우석 교수는 ‘바둑철학’ 책을 썼고 바둑학회 핵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카이스트 바둑동아리 ‘맥’은 이전 인공지능프로그램으로 명성을 떨쳤던 이름이다. 옆에서 한국기원 박치문 부총재가 “카이스트 학생들이 ‘맥’의 명성을 이어 멋진 인공지능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고 아쉬워하자 강승체 씨는 “컴퓨터 바둑대회를 크게 열고 상금을 세게 걸면 일본의 ‘젠’이나 북한의 ‘은별’을 이기는 프로그램이 나올 것”이라고 답한다.
▲ 수필부문에서 나란히 우수상을 받은 박현숙 작가와 오현세 작가의 이야기도 깨알 같은 재미가 있었다.
이 외에도 눈길을 끄는 수상자가 많았다.
수필부문에서 <인간 발전의 가늠자 바둑> 작품으로 우수상을 받은 오현세(67) 씨는 프로기사에게 3점을 놓는 실력이니 수상자 중 기력이 가장 셌다. 5년전 법무부에서 공모한 만화공모전에서 대상도 받았다. “오만가지 하는 일이 있어 한우물을 못 팠다”는 본인 말마따나 재주가 다양했다.
알고 보니 90년대 초반 ‘김인국수 바둑사랑방’이라는 286에서 돌아가는 최초의 바둑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사람이 그였다. ‘장두진 바둑살롱’이라는 프로그램 원고를 쓰고 만든 것도 그다. “그렇지만 다 망했다”며 웃는다. 너무 일찍 시대를 앞서가는 것도 사서 고생하는 길(?)이다. 운때를 잘 만났다면 바둑공모전 이전에 바둑계에 크게 이름을 떨쳤을 사람이다.
<수담일기>로 수필부문 우수상을 받은 박현숙(57) 씨는 홍일점 수상자다. 2년전 통일부에서 공모한 통일창작동화전 우수상을 수상한 동화작가다. 시도 쓴다. 어린시절 오동나무 바둑판을 애지중지 여기던 아버지 모습을 가슴에 책갈피처럼 간직해 오며 수필 같은 거 하나 꼭 쓰고 싶었던 차, 이번 공모전이 딱 맞는 기회였다.
“수학과 과학 등에서는 스토리텔링이 엄청 쏟아져 나오는데 바둑과목은 그렇지 못하다. 오늘 같이 동행한 동화작가들과 바둑동화에 대해 고민해 보자고 얘길 나눴다. 방과후나 유치원 바둑교육이 활성화되고 있는데, 가령 사소취대(捨小就大)란 위기십결을 애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겠느냐. 그냥 다가서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박현숙 작가는 일찍이 초등학교 명예교사로 바둑을 가르쳐 왔고 광나루의 교회에서 하는 노인대학에서 바둑반 봉사도 열심히 해온 숨은 ‘바둑전도사’였다.
한국 현대바둑 70주년 기념해 공모한 바둑문학상 수상작들은 한국기원이 발행하는 월간『바둑』에 순차적으로 게재될 예정이다. [사진/월간바둑 이시용]
▲ 바둑문학상 공모전 시상식 전경. 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가 공모전의 의의에 대해 되짚으며 입상 작가들을 축하했다.
▲ 시상식 후 차 한잔 나누며 담소. 예전 모 정부기관에서 주관한 공모전에서 당선한 한 작가는 당시 수상자들은 정작 뒷줄에 앉히고 기관장들만 앞줄에 주욱 앉는 권위적인 분위기에 실망했던 일화를 꺼낸 뒤 주인공인 수상자들을 앞줄에 앉힌 바둑계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며, 바둑계 문화가 훨씬 성숙하다고 말해 다들 웃었다.
.gif){kind=logo}
바둑정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