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촉, 오 삼국지에서 가장 열세인 나라가 촉이었다. 촉은 영토도 작았거니와 인구도 다른 나라의 절반밖에 안됐다. 황하, 양쯔강 주변의 곡창지대를 차지한 위나라나 바다를 낀 동쪽 강남땅을 확보한 오나라에 비해 촉나라는 중국 서남쪽 내륙, 산악지대에 박혀 있었다.

허장회도장, 양재호도장, 유창혁도장 세 곳이 합쳐 만든 충암도장은 그 규모와 인적자원에 있어 가히 위나라라 할만하다. 원장이 프로기사가 아닌 아마추어 신분임에도 강남(목동)에서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내로라하는 기사들을 대거 배출한 양천대일도장은 오나라에 비견할만하다. 촉나라에는 관우, 장비, 제갈량 같은 인재가 많았다. 장수영도장의 비조(鼻祖) 장수영 원장의 별명이 ‘장비’다. 이전까지 충암도장이나 양천대일도장에 비하면 규모나 실력 면에서 다소 열세였던 것이 사실이니 장수영도장을 촉나라에 비유할까.

삼국지에서 위촉오는 천하대권을 놓고 수없는 전쟁을 벌였다. 번갯불이 튀는 칼싸움과 화살세례가 없다 뿐 세 도장 또한 최고의 명성을 얻기 위한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수시로 벌인다. 세계인터넷바둑 대표사이트 사이버오로가 마련한 ‘3대도장 대항전’은 이들이 정면으로 일합을 겨룬, 극명한 전쟁이었다. 만날 말로만 서로가 최고라 호언하면 무슨 소용? 해서 어느 도장이 정녕 센지 멍석을 깔았다. 한판 서바이벌 마당을 펼쳤더니, 그랬더니 예상외로 장수영도장이 우승했다. 그것도 생존자를 2명이나 남기는 넉넉한 형세로. 삼국지와는 반대로 위(충암)가 가장 먼저 망했고 오(양천대일)가 촉(장수영)과 최후까지 대항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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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전을 앞두고 가진 도장순방 인터뷰에서 장수영도장의 감독격인 박병규 8단은 “양천은 팀워크가 좋고 충암은 쟁쟁한 선수가 많다. 객관적 전력은 다 위지만 무엇보다 단체전은 단합이 좋은 팀이 강하다. 장도장의 가장 큰 장점은 가족적 분위기라는 사실을 간과했다간 큰코 다칠 거다.”고 얘기했듯, 장수영도장의 우승 원동력은 가족 같은 팀워크였다. 여기에 ‘이번만큼은 뭔가 한번 보여주겠다.’는 다부진 결의가 다른 도장보다 무척 강했다. 그간 도장간 교류전에서-특히 양천대일도장에 많이 당한 울분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타 도장과 달리 선수선발전을 치른 것도 전의를 불태우기 위한 행보였다. 대항전 내내 출전선수가 둔 대국을 ‘도장 연구발표 기보’로 삼아 공동연구시간을 가졌다. 간절하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박병규 8단) “목표는 우승이라고 큰소리 쳤지만 솔직히 우승은 생각지도 못했다. 1장부터 7장까지 사전에 저마다의 특성을 면밀히 분석해 정한 대로 출전했고, 기대대로 각자 자기 역할을 십분 해냈다. 장수영 사범님께 처음 선수선발전을 치르겠다고 말씀드리자 ‘그냥 서열대로 내보내지 굳이...’ 하셨다. 선발전이라는 건 항시 실력대로 정해지는 게 아니어서, 가령 랭킹이 뒤진 임상규나 송규상 같은 연구생은 서열대로 정했다면 뛰지 못할 선수였다. 전력 측면에선 다소 손실을 보더라도 선발전이 주는 동기부여, 기회균등, 의욕 이런 부가가치를 더 사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큰 활약을 해줘 면이 섰다. 무엇보다 도장 연구생들이 이번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게 큰 소득이다.”

▲ 제1회 3대도장 대항전 대진표. 장수영도장은 1장 ‘Gracias’의 4연승으로 기선을 제압했고, 중반 '장도장'이 놀라운 3연승으로 우승문턱까지 견인한 데 이어 종반 '별의전쟁'이 멋지게 마무리하는 황금 팀워크를 보여주었다.

놀라운지고 ‘Gracias’의 4연승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선발주자로 나선 ‘Gracias’의 초장 4연승이 자신감을 가득 채웠다. ‘Gracias’는 스페인 말로 ‘감사합니다’란 뜻이라는데 이 아이디(ID)를 지은 건 그 뜻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라시아스’라는 합창단을 보고 좋아서 작명한 것이라 한다.
“이기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편하게 두다 보니 4연승을 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라이벌 의식이 있어 충암보다는 양천대일 선수와 둔 두 판이 더 껄끄러웠고 형세도 안 좋았다.”

'코피’ 터뜨린 ‘코비난미록’
충암의 체감 랭킹1위 ‘저녁에사과’(2승)를 저지한 ‘코비난미록’은 생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기에 어디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거니 했다. 알고 보니 ‘코피난’으로 아이디를 만든다는 것이 그만 오타로 ‘피’를 ‘비’로 잘못 입력한 거란다. 그럼 ‘미록’은? 이 선수의 별명이 '밀크(Milk)'인데 친구들이 장난스럽게 ‘미록’으로 발음하면서 굳어진 거라고. 여하간 ‘코비난미록’은 확실하게 상대에게 제대로 한방 먹이며 ‘코피 나게’ 만들었다.

우승의 분수령 ‘장도장’
대항전 중반, 양천대일도장의 ‘깡패소년’이 2연승을 달릴 때 장수영도장의 3번째 주자 ‘장도장’이 출전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여기가 승부의 분수령이었다. 소방수 역할을 못하면 초반 4연승으로 기세를 올리며 따놓은 점수를 다 까먹고 뒤쫓아야 하는 흐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는 전국 대회를 호령하고 있는 강자. 평소 4:6으로 밀리고 있는 상대였다.
“평소에 많이 지다보니 부담은 됐다.” ‘장도장’의 조심스런 대국소감에 박병규 8단이 한마디 거든다. “내가 본 네 바둑 중 가장 잘 둔 바둑인 거 같던데 웬 겸손?”

앞 선수들의 맹활약으로 가만히 앉아 우승한 ‘오제자’에게 최고 수훈 선수를 꼽아달라고 했더니 “모두 잘했지만 역시 ‘장도장’의 중반 3연승이 컸다.”고 추켜세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두가 가장 강력한 상대로 지목한 양천대일도장의 ‘여름향기★’까지 꺾었으니 말이다. ‘여름향기★’가 누구인가? 이미 사이버오로 ‘월간랭킹전’을 통해 그 실력이 입증된 선수다. 월간랭킹전에서 우승을 다툴 정도라면 세계정상급 수준의 프로기사라고 봐야 한다. 가장 마지막에나 나올 줄 알았던 초특급 선수가 중반에 불쑥 등장해 모두가 놀랐다. 아마 양천대일도장의 승부수였던 듯하다.

“대국장인 사이버오로에 갈 때까지 ‘힘의대가’가 먼저 출전할 줄 알았는데 ‘ ‘여름향기★’ 형이 불쑥 들어와 좀 당황했다. 부담이 없을 수밖에 없으니까 좀 그랬고...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운좋게 이겼다. 기분요?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고 아버지께서 새벽3~4시에 맛있는 걸 사주셔서 늦잠 자다 다음날 도장에 지각하기까지 했다.”
대국결과는 시간승이지만 내용은 흑의 불계승이었다. 어차피 마지막엔 각 도장의 주장급 프로들간 싸움이 될 텐데, 이를 고려할 때 이 한판의 승리는 단순한 1승이 아니었다.

▲ 3대도장 대항전은 선수 실명이 아닌 아이디로 두었으며, 매판 사이버오로 사무실에서 대국했다.

'힘의대가'의 무서운 추격, 겁나지 않았다
종반에 4연승을 올리며 가파른 속도로 쫓아온 양천대일도장의 ‘힘의대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전설을쓰다’는 사이버오로에서 주최하는 한중아마대항전에 출전할 때 만든 아이디인데 ‘좀 잘해 보려고’ 지은 이름이란다. 하지만 3대도장 대항전에서는 전설을 쓰지 못했다.
“잘 나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더라. 상대가 워낙 유명세를 타고 있는 기사이긴 하나 한번 붙어보지 하는 심정으로 뒀는데 조금씩 밀리다보니 마지막엔 조금 져 있더라.”

‘힘의대가’의 4연승을 저지하려고 나섰던 ‘짭짤순살’은 “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고자 희망했지만 생각대로 안됐다.”며 웃었다. ‘짭짤순살’은 도장 앞 닭꼬치집 메뉴 이름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힘의대가’의 막판 추격이 거셌지만 장수영도장은 여전히 에이스 둘이 남아있었기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다. 뒤에 받쳐주는 선수가 있으니까...이런 것이 여유 있게 앞선 팀이 누리는 프리미엄이다. '힘의대가'의 5연승을 저지하고 양천대일도장의 주장 ‘스페셜원’까지 잡아 우승을 결정지은 ‘별의전쟁’에게 우승상금(300만원)을 어떻게 분배하기로 했느냐고 물었더니 슬며시 박병규 8단을 쳐다본다. “일단 도장회식비를 일부 뗀 다음 나머지는 출전선수들이 알아서 자율적으로 분배하도록 맡길 생각이다.” 대신 답을 하는 박병규 8단의 얼굴은 보름달보다 둥글었다.

2회 대회는 내년 5월에 열 예정이다. 장수영도장은 그때도 대표선수 선발전을 치르겠다 한다. 대회 이후 ‘반삭’을 한 선수가 보인다. 요즘 연구생 성적이 신통치 않아 심기일전하려고 머리를 깎았다는 것이다. 장수영도장의 ‘필살기’는 이런 것이다.

▲ "너 도 닦으려 출가하냐? 웬 삭발?" "행님들...그런 정신으로 내년에 또 우승하것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