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바둑,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개로왕과 고구려 승려 도림이다. 개로왕과 도림은 정사 삼국사기의 핵처럼 튼튼하게 자리하고 있는 한중일 고대 바둑사의 유례가 없는 기록이다. 한중일의 고대 바둑사에 개로왕과 도림의 에피소드처럼,  인물 사건 구성이 똑 떨어지는 바둑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이 기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하여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에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였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나기가 늦은 것을 한탄하였다. (원문1)

이 에피소드는 사실 자체로 역사의 현장을 증거하는 현장의 중계방송이랄 수 있다. 압축과 상징 삭제와 순서의 교란 등으로 연구자들을 괴롭히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는 전혀 다르게 그야말로 기자가 현장을 직접 취재한 듯 생생하다. 이 기록의 요지는 개로왕이 폭군이고 망군이여 백제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개로왕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맞서다 한강유역에서 전사한 인물이다. 그러나 개로왕은 고구려가 자랑하는 장수왕을 상대하여 20년간 1진1퇴를 거듭 하며 공방전을 전개한 왕이었다는 점을 알고 나면 도림 기록이 무색해진다.

개로왕은 백제 역사상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안으로 귀족세력과의 갈등과 밖으로 야심만만한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 고구려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개로왕은 왕위에 오른 첫해부터 신라와 연합세력을 구축, 동북쪽으로 고구려를 견제하며 '유송'과 '북위' 등과 활발한 외교전을 펼치며 고구려의 배후를 교란하며 체제 안정을 꾀한다.

이 당시 북위에 보낸 개로왕의 표문은 삼국시대 최고의 명문으로 손색이 없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 때에 생각컨대 황제 폐하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 신[神]과 땅 신[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셔서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장이 사대의 모양이기는 하지만 외교문서라는 것을 이해하면 당대에 한문 문장을 이 정도로 구사할 수 있었던 백제의 문화적 역량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개로왕은 '문주'와 '곤지'라는 출중한 형제들이 있었고 이 정도의 고급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신하들의 보필을 받고 있던  군주가  바둑으로 위장한 일개 승려의 용간술에 말려 대세를 그릇쳤다는 것은 이 기록의 작위성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도림조의 에피소드는 긍정과 부정 두 부분으로 읽힌다.
긍정적인 부분은 도림이 말한 선왕들의 해골이 들판에 버려져 있다는 점이다. 개로왕은 삼국사기에 전하는 비유왕(해씨 진씨 세력)의 아들이 아니라 비유왕과  그 일족을 살해하고 등장한 여씨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선대왕과 그 윗대의 묘역을 방치한 것을 도림이 공과 사라는 분별력을 충고하는 대목인 것이다.

부정적인 점은 도림이 말한 왕성의 수리, 제방의 축조, 변경의 축성, 궁실의 조경이다. 이 기록은 도성의 방어력의 강화라면 이해가 되어도 방어력의 약화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왕성의 수리는 성책의 보강이 우선되는 것이고 제방의 축조나 변경 성의 축성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날마다 소나 말을 백여 마리씩 잡고 여자들 열 명씩을 들여와 동침을 했다면 몰라도(?) 궁실의 정비나 약간의 치장이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이유로는 너무도 빈약하다. 아마도 이 점을 보강(?)하기 위해 약간의 추임새로 바둑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둑이 당대에 고급 문화의 하나로 인식되어 있었다는 전제로 할 때이다. 그러나 백제에는 바둑이 일반에까지 넓게 보급되어 있던 때이고 보면 이 점도 설득력이 없다.

부정적인 것으로 또 하나는 도림이 승려였다는 점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순도에 의해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 소수림왕과 장수왕의 사이는 80년간의 시차가 있다. 이 당시 중국에 전하는 여러 불경에는 하나 같이 승려들의 금기사항으로 바둑 박희 음주 등을 적시 한다. 물론 인도의 불경에 장기(바둑인지는 확실히 모른다)가 승려들의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기록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백제 고구려가 공존하던 시대 중국불교의 분위기는 불교와 바둑은 상극이었다. 바둑을 금하는 경전으로 '정법염처경' '별석장아함경' '유마힐경' '중굴라마경' '근본설경' 등이 있다. 부처의 원음이라는 인도의 구경(口經) '숫타니파타'도 마찬가지다. 그 중 한권인 정법염처경은 이렇게 기록 하고 있다.

- 많은 중생들이 날마다 활쏘고 저포 위기 등 온갖 놀이에 빠져 모여 놀기를 밥먹듯 하고 있다. 이렇게 해 가지고는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 아무런 생산적이지 못한 일로 몸과 마음을 피폐케 한다.

도림기사는 김대문의 한산기에 전하는 도미부인 기록과 함께 백제를 폄하하기 위한 의도가 깃든 기록이라는 연구가 있는 것을 보면 이 기록의 액면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이 기록은 소중하다.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 속에 백제와 고구려 문화적 교류와 교통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단초로 훌룡하기 때문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국경을 서로 맞댄 것은 3세기초다. 그 전에는 백제와 고구려 사이를 낙랑이 가로막고 있었다. 낙랑은 백제와 고구려의 완충 역활을 했다. 그 낙랑이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깨지고 나서 두 나라는 실로 철천지 원수마냥 3백년간에 걸쳐 2백회 이상의 전쟁을 벌인다. 백제와 고구려 전쟁에서는 양국의 고국원왕과 개로왕이 전쟁터에서 살해된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보다 더 준비가 있던 왕이다. 고구려로 살피면 넘버 1이다. 그런 장수왕과 20년간을 맞서 싸운 사람이 개로왕이다. 그의 후계자들은 개로왕이 살해되었는 데도 불구, 나라를 보존하고 불과 10년 후에 고구려 복수전에 나설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개로왕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한 대목이다.

장수왕은 이 당시 왜 남진을 더 하지 않았는지 불가사의한 의문을 남긴다. 말갈군을 동원 하고 5만명의 고구려 정예를 총 출동시켜 개로왕을 살해한 입장에서 겨우 한강 유역을 점거하고 만 것은 고구려의 한계(?)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것은 고질적인 고구려가 안고 있던 내분이다.

고구려는 사실 매우 불안한 정치 결사체였다. 고조선 부여 말갈 여진 등의 잡다한 이민족의 결집으로 구성된 고구려는 언제나 반란의 원죄를 안고 기능했다. 고구려의 왕들 중 신하들에게 살해된 왕이 '모본왕' '차대왕' '봉상왕' '영양왕'이 있고 쿠데타로 실각된 왕은 수도 없다.

연개소문이 왕 이하 3백여명의 신하들을 한꺼번에 죽여버리고 정권을 잡은 장면은 고구려만이 할 수 있는 호연(?)이라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이 대장부였는지는 모르나 국가 운영의 노하우의 결집체를 일거에 쓸어내고도 나라를 운영할 수 있다고 믿은 단순한 인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의 선택은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너무도 끔찍한 대가를 치른다. 고구려, 하면 옷깃을 여미고 엄숙해지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고구려의 고질적인 내분은 두고두고 아쉽다.

개로왕과 도림은 중국식 바둑과 순장식(?) 바둑을 번갈아 두었을 것으로 본다. 백제에는 이미 침류왕 때 동진에서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들어와 있었고 아신왕은 불법을 숭상하고 복을 빌자는 고유를 할 정도로 불교가 자리를 잡고 있을 때이다.

마라난타는 인도 승려다. 당시 동진에는 인도의 고승 '구마라십'의 불경들이 번역될 정도로 인도승려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이 동북으로 이동하며 인도의 오리지널 불교를 전파 했고 인도의 시킴식 바둑을 함께 보급한다. 백제에 시킴식 바둑이 전파된 것은 이때라고 본다. 마라난타가 직접 바둑을 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라난타는 서역의 상단을 따라온 일원이었다. 시킴식 바둑은 상단이 퍼트린 것이다.

이 점을 일본의 역사학자 소천탁치(小川琢治)는 일본의 바둑은 정창원 바둑판과 만엽집에 전하는 바둑 시를 근거로 백제 또는 중국의 남방 지역에서 들어왔고 초기에는 백제와 같은 형식의 바둑을 두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개로왕과 도림의 기록은 삼국사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견강부회된 부분을 걷어내고 잘 이해를 하면 역사의 중요 기록임은 물론 바둑사에 가장 소중한 기록이며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470년대 백제 고구려 그리고 동양사의 한 페이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문1)

高句麗長壽王 陰謀百濟 求可以間諜於彼者 時 浮屠道琳應募曰 “愚僧旣不能知道 思有以報國恩 願大王不以臣不肖 指使之 期不辱命” 王悅 密使譎百濟 於是道琳佯逃罪 奔入百濟 時 百濟王近蓋婁 好博 道琳詣王門 告曰 “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 王召入對碁 果國手也 遂尊之爲上客 甚親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