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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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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4)
2013-12-31 조회 7462    프린트스크랩

          

“팀장이요?”

지현의 입이 귀에 걸렸다.

“사실 좀 늦었지. 자네 정도라면 진즉 팀장이 됐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부서장은 말을 끊고 냉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성격 좋고 리더십이 있는 부서장은 내년에 정년퇴직을 하는 서장의 후임으로 이미 결정돼 있는 상태다. 부서장은 냉커피를 마신 입을 손으로 훔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동안 마땅한 자리가 없었잖아. 교통과나 정보과 같은데는 자네 성격에 맞지도 않고 말이야. 근데 이번에 수사과를 한 팀 증반하기로 했어. 민경위 자네 팀이야.”

“수사과입니까?”

지현의 말투가 심드렁해졌다. 경찰 배지를 단 이후로 강력반이 아닌 다른 파트는 발 한번 들여놔 본 적이 없는 지현으로서는 수사과란 팀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친구야, 자네도 알잖아. 우리 서(署)에서 꽃은 수사과야. 좋은 사건은 전부 수사과에서 먹고 강력반에 떨어지는 건 겨우 찌끄러기뿐이잖아. 그거 말고 하는 일이 피라미 같은 깡패나 양아치들 뒤꽁무니 쫒는 거뿐이 더 있어? 그래서 강력반 애들이 항상 입이 튀어나와 있는 거야. 강력반 끗발 좋은 건 강남이나 신도시 쪽이지 우리 서는 아냐. 더군다나 수사과는 검찰하고도 가깝잖아. 뭐 노상 붙어살다시피 하니까.”

“검찰하고 가까운 게 뭐 좋다구요.”

“쯧쯧...자네가 그래서 그 나이되도록 시집을 못가는 거야. 검사 중에 미혼 많잖아. 하나 골라잡아서 썸씽을 만들어 보란 말이야. 자네 나이 서른셋이야. 뭐가 부족해서 싱글이야. 그 나이에.”

“말씀드렸잖아요. 전 결혼 안한다구요.”

“거짓말을 해도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해. 얼굴에 써 있잖아.”

“뭐가요?”

“남자가 그리워 죽겠다고.”

“부서장님!”

지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내 말 못 믿겠으면 거울을 봐봐. 얼굴이 활짝 피었잖아. 꽃처럼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야. 꽃이 벌을 유혹하는 거잖아. 결혼할 때가 됐다는 거야. 내 나이쯤되면 그런 게 다 보인다구. 절대 못 속여.”

지현은 옆에 걸려있는 거울을 힐끗 돌아봤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춰졌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에서 빛이 났다. 사실 화장할 때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랑...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호철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도 지현의 눈 속에는 호철이 담겨져 있었다.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때 부서장의 말이 들렸다. 속마음이라도 들킨 듯 깜짝 놀란 지현이 거울에 있던 시선을 부서장 쪽으로 옮겼다.

“암튼 말이야. 지금부터 팀메이트를 물색해 놔. 호흡 잘 맞는 놈으로 여섯 명만 골라. 두 달 후에 팀 만들어야하니까 시간이 별로 없을 거야.”

“강력반 인원도 괜찮습니까?”

“자네 라인이 어차피 그 쪽뿐이 더 있어? 능력만큼 스카웃해. 본인이 자네 팀으로 간다면 막을 사람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부서장실을 나온 지현의 입은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드디어 내 팀이 생긴다. 보스가 된다. 가슴이 설레였다. 이 사실을 당장 호철에게 달려가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내일까지는 만날 수 없다고 말하는 호철이다. 연쇄살인범 사건하고 관계가 있는 건 분명한데 자세한 말을 하지 않으니 알 도리가 없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더욱 보고 싶은 마음을 만들었다. 어젯밤도 호철의 생각으로 잠을 설친 지현이다. 지현의 머리 속이 호철로 가득 채워지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호철인가 싶어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보는 지현이다. 핸드폰을 본 지현의 얼굴은 실망감으로 가득했다.

“아빠다.”

핸드폰 너머로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력적인 목소리다. 이 목소리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유혹됐을까 생각하는 지현이 건조하게 대답한다.

“웬일이어요.”

“웬일은...너무 소식이 없어서 말이야. 통 집에도 오지 않고. 차로 이십 분 거리뿐이 안되는데 왜 그렇게 뜸해?”

“바빠요.”

“알아. 바쁜 건. 그래도 부녀지간에 가끔 얼굴은 봐야지. 내가 가고 싶어도 니가 싫어할 것 같아서 말이야.”

“맞아요.”

“하하하...”

지현의 건조한 말에도 아빠는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매력적인 웃음소리다. 사실 얼굴도 배우 뺨치게 잘생겼다. 어떤 여자라도 한번 보면 빠질만했다. 아빠는 그렇게 태생적으로 바람둥이었다. 아빠의 매력에 빠져 결혼을 한 엄마는 그 매력 때문에 속을 썩였다. 삼십년 가까이 아빠의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인 엄마는 결국 이혼을 했다. 오년 전 일이다. 이혼했다고 아빠가 변할 리는 없었다. 아빠는 여전히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끊임없이 여자를 탐닉했다. 그것도 부족해 일년전에는 아예 어떤 여자를 집에 들어앉혔다. 지현이보다 겨우 네살 많은 여자다. 정식으로 혼인 신고도 했다. 두 사람이 혼인 신고를 한 날 지현은 집을 나왔다. 지현에게 이 세상 모든 남자는 아빠와 같이 여자에 굶주린 하이에나로 보였다. 호철을 만나기 전까지.

“그래. 가끔 엄마는 만나니?”

“그게 왜 궁금한데요?”

“녀석아, 네 엄마니까 궁금하지.”

역시 아빠다운 대답이다. 지나간 여자는 누구도 머리 속에 담아두지 않는 아빠다. 딸의 엄마기 때문에 궁금할 뿐이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지현이다.

“용건이 뭐여요? 저 바빠요.”

“아...그래. 뭐 부탁 하나 하려고.”

“무슨 부탁이요.”

“내가 말했지? 요즘 내가 취미로 컴퓨터 배운다고.”

“그런데요?”

“컴퓨터 학원에 같이 배우는 수강생이 있는데 좀 골치 아픈 문제가 있나봐.”

“무슨 문제요.”

“그게 뭐냐.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거 말이야.”

“스토커요?”

“그래. 스토커. 그거 때문에 골치가 아픈 친구가 있다는데...”

역시 여자다. 아빠의 인생에서 여자를 빼면 공기뿐이 남지 않을 것이다.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하고...”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세요.”

“그게 말이지...좀 문제가 있어. 그 친구가 말을 못해.”

“네? 벙어리여요?”

“그래. 너도 잘 알겠지만 그 스토커라는 게 쉽게 범죄 입증이 안된다고 하더라고. 그런데다 그 친구가 말을 못하니까 더욱 힘든 모양이야. 몇번 경찰서를 찾아갔는데 아예 사건 접수조차 안해준다는 거야. 불쌍한 아이야. 네가 좀 도와줄 수 없겠니?”

“아이라고요? 몇 살인데요.”

“스무살쯤 됐을 거야.”

스무살이라면 아빠하고 서른일곱살 차이다. 설마 이런 어린 여자한테 딴 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아빠와 관계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적개심이 풀어지는 지현이다.

“그 여자 어디 사는데요.”

“그건 나도 몰라. 네 번호를 가르쳐줬으니까 문자가 갈 거야.”

“결국 부탁이 아니라 통보군요.”

“미안하다. 그 아이가 워낙 딱해서 말이야.”

“알았어요. 문자 오면 한번 만나볼게요.”

“그래. 고맙다.”

“아빠가 고마워할 일은 아니어요. 끊어요.”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는 지현이다. 지현의 인생에서 아빠는 커다란 암덩어리다. 그렇다고 제거할 수도 없는.

 

 
바둑돌 놓는 소리가 마치 메트로놈 소리처럼 일정했다. 규칙적이다. 장고를 하는 것도, 그렇다고 빨리 두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바둑은 보나마나 재미없는 바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바둑은 지지부진했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중반을 넘고 있었다.

바둑판 한 곳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녀가 특유의 기계음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찔렀어요.”

호철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흑이 한칸 뛰는 곳을 찌른다는 뜻인가. 아니면 호구에 찔러 넣는다는 뜻인가. 그 이해하지 못할 말을 소녀가 해석해준다.

“강도를 내가 찔렀어요.”

호철이 납처럼 굳어진 얼굴을 들었다. 소녀는 여전히 바둑판의 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층 내방에서 내려올 때 강도는 엄마를 찌르고 있었어요. 그때 손이 등 뒤로 묶인 아빠가 강도한테 덤벼들었어요. 필사적이었어요. 그래도 역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어요. 강도가 칼로 아빠를 찔렀어요. 한번, 두번, 세 번...아빠가 무너져 내렸어요. 피투성이었어요. 강도도 정신이 나간 것 같았어요. 내가 가까이 가는 것도 모른 채 아빠를 내려다보며 숨을 헐떡였어요. 바로 한걸음 앞까지 갔을 때 비로소 나를 봤어요. 강도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어요.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몰라요. 나 때문이지, 아니면 내 손에 들린 칼 때문인지...”

소녀는 고개를 들어 호철을 보았다.

소녀의 무표정한 검은 눈동자가 호철의 눈을 빨아들였다.

호철의 몸도 빨아들였다.

바둑판도 빨아들였다.

주변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온 세상이 소녀의 눈동자에 갇혔다. 블랙홀 같은 어둠이다.

그 어둠 속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징소리처럼 울렸다.

“강도를 찔렀어요. 그리고 죽은 아빠 등 뒤에 묶인 끈을 칼로 잘랐어요. 칼은 아빠 손에 쥐어줬어요. 그렇게 강도는 아빠가 죽인 걸로 됐어요.”

세상이 다시 어둠에서 벗어났다.

호철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소녀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 처음 느꼈어요. 희열이라는 것을요. 강도의 뱃속 깊숙이 칼로 찔렀을 때 처음 느꼈어요. 태어나서 한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어요. 내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었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윤진우, 오상복. 그리고 강무세.”

소녀는 말을 끊었다. 침묵이 흘렀다. 호철의 머리 속은 하얗게 텅 비어 있었다. 그냥 망연히 바둑판을 바라볼 뿐이었다. 길이를 잴 수 없는 침묵을 바둑돌 놓는 소리가 깨트렸다. 착점의 여운이 채 끝나기 전에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바둑이 우리한테는 마지막 바둑이어요.”

호철이 고개를 들어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호철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기면 힌트를 줄 거여요.”

“힌트? 무슨 힌트?”

호철의 목소리는 얼음을 깨트리는 것처럼 차가웠다. 아직도 더 내놓을 게 있느냐고 묻는 호철이다. 소녀는 대답 없이 무심하게 호철을 바라볼 뿐이다. 그 무심한 눈에서는 무엇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가 있다. 지금까지 소녀는 빈말이란 게 없었다. 아무리 지나가는 말이라도 빈말이 아니었다. 단지 호철이 그 순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이번에는 뭔가. 아이큐 178의 천재가 내놓을 카드는.

호철은 시선을 소녀의 눈에서 바둑판으로 옮겼다. 지금까지 지지부진한 바둑은 그런 대로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겨야 한다. 힌트의 의미를 알려면 어쨌든 이겨야 한다. 호철의 가슴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착점이 달랐다. 패기가 있었다. 지금까지 지지부진했던 바둑이 치열해졌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전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전투가 벌어질 상황은 이미 지나간 상태다. 흑백 서로 자신의 영토에 경계선을 그렸다. 단 한집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흑백은 국경선에서 치열하게 육박전을 벌렸다.

한수를 놓을 때마다 계가를 하는 호철이다. 흔히 말하는 눈터지는 계가 바둑이다. 누가 이겨도 겨우 한두 집 승부다. 그 한두 집이 끝내기에서 왔다 갔다 한다. 수순이 삼백 수를 넘고 있었다. 호철의 머리 속은 온통 숫자로 뒤엉켰다. 집중력도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착점을 하는 손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계가는 이제 무용지물이다. 누가 이겼는지는 이미 바둑판 위에 기하학적으로 고착돼 있다.

따악...

마지막 공배를 매우는 소녀의 착점소리가 암울하게 거실에 울려퍼졌다. 계가만 남았다. 호철이 계가를 하려고 사석을 상대 집에 매우는 순간 소녀가 물끄러미 바둑판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집 졌어요.”

호철이 문득 소녀를 올려보았다.

도대체 누가 졌다는 건가.

그 대답을 소녀가 한다.

“백 서른일곱 집, 흑 서른여덟 집. 내가 졌어요.”

소녀가 바둑판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바둑을 끝까지 뒀으며 계가를 하는 게 예의여요. 아빠가 말했어요.”

소녀의 말대로였다. 백 서른일곱 집, 흑 서른여덟 집. 흑 한 집 승이다.

계가를 마친 소녀가 마치 독백처럼 입을 열었다.

“사소취대여요.”

“사소취대?”

소녀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호철이다.

이게 웬 엉뚱한 소리인가. 사소취대(捨小取大). 바둑 격언집 위기십결에 나오는 사자성어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이게 도대체 무슨 힌트인가. 작은 것은 뭐고 큰 것은 뭔가. 머리가 복잡해지는 호철이다. 호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바둑돌을 정리하고 목례로 인사를 한다.

“우리 내일 만날 거여요.”

소녀가 말하는 힌트의 저의를 생각하는데 여념이 없는 호철에게 뜬금 없는 소녀의 말이 들렸다. 호철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는 것 같았다. 호철은 내일 소녀를 체포할 생각이다.

“마지막 만남이어요.”

소녀의 말이 호철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호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녀의 시선을 피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호철이다. 노을이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뭉크의 절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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