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과 무협이 내 청춘시대의 전부였다

그를 생각하면 항상 통통한 달걀형의 웃는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꽤 여러 차례 만나 많은 시간을 어울렸는데도 웃지 않는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무튼 늘 웃음을 채우고 다니는 그의 얼굴을 보면 이따금씩 그가 강릉에서 손꼽히는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부드럽게 처지는 눈꼬리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유비(劉備)를 연상시키는데 큰 귀가 없으니 그건 곤란하겠다. 사람 좋은 푸근한 웃음, 어눌한 말투는 영락없는 동네 ‘쌀집아저씨’. 그렇지만 사실, 그는 꽤 잘 나가는 변호사다.

영화나 TV드라마에 나오는 핸섬하고 이지적인(거기다가 부유하고 자상하기까지 한) 도시의 영웅은 잊는 게 좋겠다. 그건, 대중의 욕구에 충실히 부응하는 엔터테인먼트가 만들어낸 판타지다. 아니, 부드러운 마스크로 TV 오락프로에 몇 차례 얼굴을 비치고 정수기 광고를 찍더니 덜컥, 서울시장이 돼버린 분을 생각하면 현실이 판타지이기도 한 건가.

아무튼 그는 바쁘다. 가까운 사람이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저런 모임 짬짬이 재판 스케줄을 체크하고 법원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약속 장소에 나타나는 그의 동분서주(東奔西走) 일상에 익숙하다.

약속이 그의 동문모임 시간으로 함께 잡힌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웠다.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출발해 약속 시간 오후 1시에 정확하게 강릉 경포대 앞 ‘파도횟집’에 도착. 17인의 동문모임을 겸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등대가 있는 바닷가에서 기념사진 한방 찰칵! 헤어지면서 저녁약속을 다시 잡았다. 기자의 주문은 딱 하나.

“그림이 이쁘게 잡히는 집으로 정해주세요.”

약속장소는 ‘평창 한우갈비’. 실내 인테리어가 정갈하긴 한데 그림보다는 동반자들의 입맛을 더 배려했다는 느낌이 든다. 7시를 조금 넘겨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삐 들어선다. 재판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러 일과를 정리한 뒤 이미 한 차례의 모임을 거쳐 오는 길이라고. 자리에 앉자마자 의례적인 취조(?)가 시작됐다.

성명 고광록. 직업 변호사. 61년 9월 강릉 출생. 강릉고등학교 17회. 고려대학교 법대 81학번. 사시 34회, 연수원 24기. 판, 검사를 거치지 않고 연수원 수료 후 95년 개업.

그는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대하고 늘 겸손하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재산이나 학력 같은 배경을 살피지 않는다. 그의 표정에서 어두운 부분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좋은 부모를 만나 좋은 환경에서 밝고 바르게 성장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련이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시련을 극복하고 ‘시련이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해준 밑거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체험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눈물 젖은 빵’은 먹지 않는 게 더 좋다.

누가 보아도 동분서주요, 신출귀몰(神出鬼沒)의 바쁜 일상을 가진 변호사가 바둑은 또 언제 배우고 언제 유단자가 됐을까. 질문지라도 미리 건네줬던가? 금세 답이 돌아온다.

“어렸을 때 형들한테 배웠어요. 우리 가족이 9남매에 형제만 여섯인데 제가 막내죠. 남자들은 아버지부터 저까지 모두 바둑을 둡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쯤 지금 기력(아마 5단)이 됐어요.”

그래서 그랬나? 이 사람이 바둑을 말할 때는 승부의 예기(銳氣)보다 가족의 단란함이 먼저 느껴진다. 특이한 것은 바둑판 앞에 앉기만 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는 거다. 무지막지한 완력을 휘두르는 속칭 ‘깡패바둑’. 평소 그의 부드러운 미소만 생각하고 적당히 상대했다가는 ‘초전박살’의 제물이 되기 십상이다.

신기하다. 세상에서 제일 바쁘게 사는 사람 같은데 프로, 아마를 막론하고 강릉에서 개최되는 바둑대회에는 으레 그의 얼굴이 보인다. 후원자가 됐든 관계자가 됐든 강릉 또는 그 인근에서 벌어지는 바둑대회에 그의 이름이 빠지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아마 강자나 프로들과의 교분도 넓고 두터워질 수밖에 없다.

“허장회 사범님과는 꽤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었죠. 알고 보니 저랑 비슷한 데가 많으시던데요. 아버님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내신 데다 9남매의 막내인 것도 같고···.”

한국프로바둑의 최대파벌 ‘충암사단’을 이끌어온 허장회 9단은 연고지가 강원도다. 다섯 점으로 지도를 받는다는데 한번도 100수를 넘겨본 적이 없다고 실토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마5단이 다섯 점을 깔고 둔다면 어지간히 버텨야 하지만 그는 프로들이 접바둑 상대로 가장 좋아하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프로를 상대로 호선바둑이나 하수 상대하듯 완력을 휘둘러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나.

바둑행사라면 빠짐없이 얼굴을 내미는 이 사람에게 바둑은 뭘까. 문득, 그게 궁금해져서 물었다. 바둑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까. 바둑으로 만들어진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있을까. 뜻밖에도 솔직한(?) 대답이 흘러나온다.

“솔직히 바둑이 인생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냥 즐길 뿐이죠. 그런데, 제 젊은 시절은 바둑과 무협소설이 전부였습니다. 그걸 빼놓으면 이야기할 게 없어요.”

어느 분처럼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었다’도 아니고 ‘내 청춘의 전부가 바둑과 무협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읽었다는 무협소설 이야기가 기자의 귀를 간질인다. 하긴, 바둑 좋아하는 사람치고 무협소설 싫어하는 사람 못 봤다.

“와룡생(臥龍生)이나 고룡(古龍)도 좋아하지만 김용(金庸) 선생의 작품을 특히 좋아합니다.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봤죠.”

기자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무협소설을 읽었다. 입문작 ‘군협지(群俠志)’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무림의 효웅 역천행을 불공대천의 원수로 둔 주인공 서원평이 소림사에 침입, 연금(軟禁)중인 고승 혜공과 인연을 맺은 뒤 강호로 나간다.

주먹바람으로 바위를 쪼개는 백보신권 사자청, 지금은 개방으로 더 많이 소개되는 궁가방의 신개 종도와 같은 수많은 기인이사와의 조우. 끝없이 이어지는 위기와 기연. 신비의 자의소녀와 나누는 풋풋한 사랑도 소년의 가슴을 뒤흔들어놓았음이 틀림없다. 자의소녀와 함께 고묘(古墓)에 갇히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절정과 비슷하게 겹친다.

그런데 바둑이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삶의 기본조건 의식주를 따지면 그 말은 맞다. 사람이 입고 먹고 자는데 바둑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재화로서의 가치가 없으니 목숨 걸고 매달릴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안다. 스스로 ‘그냥 즐길 뿐이죠’라고 말했듯이 바둑은 곧 즐거움이다. 그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는데 그런 일들은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은 일이 더 많다. 온갖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바둑은 어떤가. 재화로서의 가치가 무용하기 때문에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을 재화 획득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의 말처럼 그냥 즐기면 되니까.

선각들은 일찍이 바둑으로 얻는 다섯 가지 이로움 즉, ‘위기오득(圍棋五得)’을 가르쳤다. 그는 어떨까. 첫째 ‘득호우(得好友)’ 그는 이미 수담을 통해 좋은 벗을 많이 얻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득심오(得心悟)’ 글쎄, 딱히 바둑을 통해서 얻었다고 우기기에는 낯간지러운 일면이 있으나 그에게는 깨달음, 마음의 깊이를 얻은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셋째 ‘득인화(得人和)’ 좋은 벗을 많이 사귀고 마음의 깊이를 얻은 사람이라면 누구라서 화목하지 않겠나. 바둑과 함께 하는 자리에 치졸한 다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때 앞에 나서 주도하기보다 융화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넷째 ‘득교훈(得敎訓)’ 인생의 지침을 얻는다. 삶은 되돌려 다시 시작할 수 없지만 바둑에는 복기(復棋)라는 게 있다. 패배는 다음에 얻을 승리의 지침이 되며 그것은 곧 인생의 교훈이 된다. 그는 성공했지만 자신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다.

다섯째 ‘득천수(得天壽)’ 앞의 네 가지를 모두 이룬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아직은 알 수 없으나 주변에 좋은 벗이 많고 마음의 깨달음을 얻었으며 매사에 화합하는 균형을 갖춘 사람이니 천수를 누리지 않겠는가. 그는 바둑으로 얻을 것을 이미 다 얻었다.

그가 얻은 것은 더 있다. 바둑은 현대에 이르러 직업 프로페셔널이 탄생하고 그 저변이 대중으로 넓어지면서 역할도 커졌다. 좋은 벗을 만드는 바둑의 공능은 국가의 경계나 이념마저 쉽게 뛰어넘는 마력을 발휘한다.

그런 모범사례가 강릉-우한(武漢)의 민간교류다. 그는 2004년 가까운 벗들과 중국의 ‘우한 투어’로 막이 오른 LG정유배 결승국을 참관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연을 맺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중견 기업가들과 강릉의 동우회 회원들이 매년 강릉과 우한을 오가는 교류전을 시작했다.

딱딱한 문서가 오가는 공무로써 추진하면 얼마나 긴 시간을 공들여야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후베이성 정계 인사들과의 교분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가 몸담은 모임(강릉시 다섯 개 고등학교 80년 동우회)은 ‘무한회’로 명칭이 변경됐고 이 모임은 강릉시가 인정한 ‘강릉-호북성 문화교류협회’라는 대외 공식명칭을 하나 더 갖게 됐다.

최근의 국수전 50주년 기념 ‘우한투어(제50기 국수전 도전1국)’ 역시 강릉의 ‘무한회’와 교류중인 ‘후베이성 기업가 바둑클럽’의 후원에 의한 것이다. 우한투어에 동행했던 동아일보의 이민희 부국장은 ‘사업국의 많은 행사를 참관했지만 이토록 감동적인 환대는 처음’이라며 우한의 기업가들에게 감사를 표했는데 우한 기업가 바둑클럽 멤버들의 한국사랑, 그 애정표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강릉을 방문했던 기업가 바둑클럽의 장쥔(張軍) 씨는 처음 맛본 한국음식에 매료돼 ‘백제원(百濟園)’이라는 우한 최고의 한국음식점을 개업했고 우한의 대표기업으로 중국바둑리그 참여중인 ‘런푸(人福)그룹’의 프로바둑단의 허레이(河銳) 단장은 ‘한국 친구들은 모두가 라오펑여우(老朋友- 오래된 진정한 친구)’라며 매년 1회로 진행중인 교류전을 ‘연중 2회로 하자’고 조를 정도다.

이들은 지난해 ‘무한회’가 우한을 방문했다가 강릉으로 돌아갈 때 교류전 장원준(張文俊) 단장을 비롯한 클럽의 주요 멤버들이 모두 공항까지 환송을 나왔다. 짧은 2년간이만 그동안 쌓인 우한과 강릉의 우의가 얼마나 두터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우연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몇 차례 ‘손의 대화[手談]'가 한중 민간교류의 초석이 됐다. 한 알의 씨앗이 대지에 떨어져 넓고 푸른 들판을 이루듯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루어지는 문화란 대체로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모든 ‘조화(調和)’를 이끌어낸 고광록 변호사는 오늘도 동분서주, 신출귀몰하며 이렇게 말한다.

“바둑이요? 그거 인생에 별 도움 안됩니다. 그냥, 즐기는 거죠.”

그렇다. 무용한 바둑은 가볍다. 재화의 무게로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저 즐기면 된다. 바둑은, 노곤한 삶의 여정에서 잠시 마음을 풀어보는 쉼터, 인생의 작은 여백이다.

‘평창 한우갈비’는 강릉에서 제법 유명한 고깃집. 질 좋은 한우만을 엄선해 고객의 상에 올리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마블이 촘촘하게 골고루 퍼진 꽃등심은 소문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툼하게 썬 싱싱한 육회도 별미.

 물론, 고기보다 자리를 안내해준 ‘무한회’ 최잔희 부회장의 구수한 입담과 잠시 옛 시절을 회상하게 해준 고광록 변호사의 무협이야기가 더 좋았지만.

꽃등심 1인분 25,000×5+육회 한접시 30,000+소주 1병 3,000×4=18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