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구한말에서 걸어나온 바둑.
2. 사동궁 기원.
3. 바둑을 좋아하던 의친왕.
4. 이학진 선생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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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구한말(舊韓末)에서 걸어나온 바둑



送舊忘年癸巳迎新.
가는 해를 박수하고 오는 해를 안아주시라.

진정한 문학은 작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말은 김윤식이 한 말이다. 김윤식은 자신의 신념대로 살면서 한국 문단의 큰 별이된 사람이다. 필자는 그의 글 한편을 읽다가 바둑을 언급하기에 호기심을 가졌었다. 필자는 그를 잘 모르기에 그가 바둑을 얼마나 이해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깊은 사유와 어법을 긍정할 뿐이다.

김윤식은 게오르그 루카치의 책을 평하며 '운명이란 말을 바둑돌처럼 놓고 있다' 했다. 운명이 어떻게 바둑돌 같은 것일까. 운명은 바둑판 위에 놓인 바둑돌 같다는 의미인 듯한데 딱히 감이 오지 않는다. 루카치는 개인의 공부는 자신과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던 사람이다.


운명(運命).

김윤식은 분명 그것이 바둑돌처럼 놓여 있다고 했다. 운명이란 말을 떠올리면 필자는 주역의 신명(神明)이 생각난다. 공자(마왕퇴백서본)는 신명에 밝은 사람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명을 돕기는 하지만 서책(筮策)의 숫자에 통달하지 못하면 무(巫)가 되고, 숫자에는 밝으나 명(命)에 밝지 못하면 사(史)가 된다. 나는 巫와 史의 길을 가지만 그들과는 돌아가는 길이 다르다.

운명은 신명의 눈으로 볼 때만 보이는 개인의 앞날이겠다. 신명의 눈을 가진 사람은 무당이고 무당의 일을 기록하는 사람은 역사가라는 말이다. 공자는 신명과 역사에 두루 관심이 있지만 자신의 길은 그 길이 아니라고 했다. 철인(哲人) 공자도 자신의 길을 말한다. 자신의 길 그것이 바로 운명이란 것이다.


바둑이 대저 무엇이기에 그 바둑에 인생을 건 사람들을 본다. 광택에 관계 없이 그저 바둑이 좋아 그 속에 머무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을 생각하며 바둑판 위에 돌 하나를 놓는다. 형광등을 끄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으로 보이는 바둑돌은 사선(絲線) 위에서 외롭다. 사선 위에 놓인 바둑돌을 구한말의 국수 채극문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늘날은 바둑판 위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시대다. 우리들은 그 극단적인 공간 위의 생사의 선 위에 놓인 바둑돌과 같은 신세다. (嗚現世卽生存競爭之全局也.吳人是死線彷遑之分子)

채극문의 이 말은 김윤식이 말한 운명의 바둑돌이란 말을 어느 정도 실감나게 한다. 운명이란 말을 생각하며 허접한 경로를 걸어온 필자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지난 2개월여 휴가(?) 끝에 문용직 사범의 현대바둑사라는 연작을 읽고 구한말 준비 없이 근대라는 시대를 맞이한 조선의 바둑사를 다시 돌아본다. 조선의 근대화기 일본바둑의 수준을 조선에 각인시킨 사람이 한 명 있다.


1907년 월간지 '조선과 만주'에 '위기의 기원'이라는 글을 기고한 필자이자 일본 전문기사였던 다카베 도헤이(高部道平, 당시 4단)는 1908년 중국과 조선을 여행하며 양국 고수들과 바둑을 둔다. 그는 중국에서 당시 중국바둑의 4대천왕으로 불리던 '장락실' '진사준' '왕인향' '왕은봉'을 모두 두 점으로 꺾으며 기염을 토한다. 다카베 도헤이는 내친걸음에 조선의 고수들을 불러낸다. 경성에서 그의 상대로 나선 사람이 '유풍기'다. 장소는 '남산구락부' 특별대국실이었다. 유풍기는 당당하게도 선으로 그와 대국을 한다. 중국의 4대 고수를 두 점으로 침몰시킨 다카베 도헤이에게 선으로 맞선 유풍기는 상대를 긴장시킨다.

이 대국을 주선한 경성거류민단의 유력자 '기쿠치 겐조(菊池謙)'는 유풍기가 백남규보다 두점이 강하다 했고 '다카베 도헤이'도 동료기사 '가리가네 준이치'를 통해 유풍기의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대국이 성사된다. 결과는 다카베 도헤이'의 승리로 끝났다. 이 대국으로 그는 경성에서 일본인들의 영웅이 된다.

다카베 도헤이는 유풍기와의 대국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1912년 일본의 '기계신보'에 기고를 했다. '유풍기에게 지면 어떡하나'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말이다. 이 말은 유풍기의 기력이 그만큼 출중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구한말 조선의 고수 유풍기는 북경 상해의 기단을 주름잡던 중국의 바둑 4대천왕들을 모조리 두 점으로 침몰시킨 다카베 도헤이를 선으로 맞아 분전한다. 이것은 바둑사의 대사건이다. 

유풍기는 '이오모토 가오루(岩本薰)'도 한번 더 언급했다. 그러나 이후 유풍기는 한국바둑사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자취뿐만 아니라 불가사의할 정도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잊혀진다. 오직 '다카베 도헤이'의 기록을 토대로 몇몇 연구자의 주변에서 맴돌 뿐이었다. 유풍기의 성씨가 유(兪)와 유(愈)로 혼동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사람을 구한말 양평사람 지남규도 거론한 바 있다.

이 증언은 구한말 김만수, 백남규, 노사초로 알려진 조선 3대 고수라는 말이 사실과는 조금 다른 말이라는 의미다.  (다음편 사동궁기원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