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무엇인가 자신의 일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때는

내가 사물을 보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 때였다.그 때 내 나이는 스물 여덟이었다.

그런데도 나의 스물 여덟 살 되던 해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이 지나갔다.
돌이켜 보니, 그 때 카르파치오에 대한 논문을 썼었는데, 그 수준이 형편없었다.
《결론》이라는 희곡을 시도해 보기도 하였으나

그릇된 관념을 애매한 수단으로써 증명하려 한 데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시도 몇 편 써 보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로 시를 쓴 것 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가능하다면 80년을 두고 꿀벌처럼 열심히 꿀과 의미를 모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마지막에는 겨우 열 줄 정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시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의 표현이라면 어린아이도 남아 돌아갈 만큼 많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사실(事實)의 경험(經驗)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都市), 많은 사람, 많은 책을 보아야 한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를 느껴야 하고, 아침에 피는 작은 풀꽃의 고개 숙인 부끄러움을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미지(未知)의 나라들의 길, 뜻밖의 해후(邂逅),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 이별,
또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남겨진 어린 날의 추억,
모처럼 기쁨을 가져다 주었는데도 그것을 잘 몰랐기 때문에

잔혹하게도 양친의 마음을 슬프게 해드린 어린 날의 행동,

온갖 변화를 보이며 이상한 발작을 했던 소년 시절의 병,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한 방에서 보냈던 하루,
바닷가에서의 아침, 바다 그 자체의 모습, 저쪽 바다, 이쪽 바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덧없이 사라진 여로의 밤들,
그런 것들을 시인은 회상할 수가 있어야 한다.
아니 그저 모든 것을 회상할 뿐이라면 사실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하루하루의 밤이 전날 밤과는 전혀 같지 않은 규방의 행위, 임산부가 부르짖는 소리,
새하얀 옷 속에서 푹 잠이 들어, 그저 육체의 회복을 기다리는 산후(産後)의 여인,
시인은 그것을 추억으로 가져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머리맡에 붙어 있어야 하며,
열어젖힌 창문이 밤새 덜컹거리는 방안에서 경야(經夜)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추억이 많아지면 다음에는 이들을 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는 이 같은 추억이 되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커다란 인내심이 필요하다.

추억만 가지고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추억이 우리들의 피가 되고, 눈이 되고, 표정이 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이제는 우리들 자신과 구별할 수 없게 되어서야 비로소 뜻밖의 우연으로부터
한 편의 시의 첫 구절이 그들 추억의 한 가운데에서 불쑥 솟아나는 것이며

그로부터 한 편의 시가 시작되는 것이다.

(중략)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은 아무래도 우스운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나의 좁은 방에 앉아 있다.

브리게는 - 이미 스물 여덟이 된 나는 아직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이런 곳에 앉아 있으며, 전혀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파리의 오후 잿빛 하늘 아래 5층의 낡은 집에서,
이 이름도 없는 아주 보잘것없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이렇게 너저분하게 상념에 잠겨 있다.
나는 생각해 본다. 과연 어느 누구도 진실한 것,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을까?
과연 누구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했을까?
인간은 이미 수천 년 동안 보고, 생각하고, 글을 써 왔는데,
그 수천 년이 버터 빵과 한 개의 사과를 먹는 국민학생의 점심시간처럼 그냥 공허하게 사라져 가도 좋은 것인가?
그렇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발명과 진보, 문화와 종교와 성현의 교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제까지나 인생이 표면으로부터만 흐릿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더구나 무슨 의미를 가진 이 인생의 표면에 알 수 없는 답답한 천을 발라서,
이를테면 한가한 여름 휴가기의 살롱의 의자처럼 본질을 감추어 버린 것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럴 수가 있을 지도 모른다.

세계의 모든 역사가 잘못 이해되고 있을 수가 있을까?
과거는 모두 그 시대 어리석은 민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오류라 할 수 있다.
중심이 되는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오직 그것이 알 수 없는 것이고 이미 죽어 버렸다는 이유만으로

그 주위에 어중이떠중이의 울타리를 쳐도 좋다는 것인가?
그런 일이 있을지라도 모른다.

세상의 태어나기 전의 일을 하나씩 쫓아가서 그것을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인간은 모두 전생(前生)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다면 이러쿵저러쿵하는 남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일일이 설명을 하며 돌아다녀야 할 것인가?
그러면 이러한 성질의 사람이 아직 어디에도 없는 과거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오히려 모든 현실은 그에게 있어서 무의미하고,
그의 현실생활은 어떤 것과도 연관이 없이 텅 빈 방안의 시계처럼

그저 지나가 버린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그것도 있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어여쁜 처녀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일이 있을까?
'여자들'이라고 하고, '소년들'이라고 하면서, 이들 모임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신(神)이라고 말하면서 신을 무슨 공동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를테면 어떤 두 학생이 같은 날 똑같은 칼을 산다고 했을 때,
한 두 주일이 지나서 두 학생이 자신이 산 칼을 서로 보인다면 칼은 어느새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두 학생의 어머니들은 각기 '우리집 아이의 손에 들어오면 무엇이든 엉망이 되니까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신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는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장식해 둔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만일 이러한 일이 모두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절대로 나는 무엇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번 이러한 불안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누구든 간에 먼저 무엇인가
이 엇갈린 하나로부터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가 설령 적당한 인간이 아닐지라도 그저 인간의 한 사람이기만 한다면,

결국 자기 이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나는 아직 나이도 젊고 한쪽 구석에 한 사람의 이국인(異國人)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브리게는 파리의 5층 하숙방에 앉아서 밤낮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일의 종결은 쓰는 것이다."